* 돌이킬 수 없는 / 석율->백기->해준


“…백기 씨?”
“후으… 왜요오…”

취했다. 취했어. 그것도 완-전. 석율이 피식 웃으며 한 번 더 백기의 이름을 불렀다. 백기 씨. 왜 부릅니까아, 하는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안경 너머의 풀린 눈이 저를 향함에, 등줄기를 타고 허리께까지 짜릿한 감각이 내달렸다. 몽롱하다 못해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백기의 눈은 좀 위험했다. 넙죽넙죽 주는 대로 잘 받아 마신다 싶더니, 결국 오늘도 먼저 테이블 위로 엎어진 백기를 석율이 눈으로 훑었다. 저번엔 집까지 데려다 주는 센스를 발휘했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그럴 예정이 없었다.


꽤 무거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볍다. 그렇다고 안 무거운 건 아니지만. 완전히 늘어져 버린 백기를 업고 들어와 침대에 조심조심 눕힌 석율은 거칠어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꽤 빨라진 심장박동이 쿵쿵 귓가를 때린다. 잠버릇이 없는 건지 백기는 눕혀준 그 자세 그대로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다. 이봐요, 장백기 씨. 누가 이렇게 예쁘게 자래요. 경계도 안 하고. 외간 남자 집, 그것도 침대 위에서. 응? 하고 싶은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속에서 맴돈다. 피식 웃어 버린 석율이 이내 백기의 안경을 벗겨냈다.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도 요령 좋게 한 손으로 풀어내 안경 옆에 두고 목 끝까지 채워진 단추를 끄르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다.

또 하나 의외. 피부가 그다지 까맣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는데… 장그래보단 덜하지만 어쨌든 남자치고는 하얗다. 석율은 셔츠 사이로 드러난 백기의 가슴을 지나 허리에 머무르던 시선을 거두고 제 마이를 벗어 의자에 던졌다. 자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취미는 없으니, 일단 깨워야겠지. 누가 업어가도 안 깰 것 같이 잠든 백기의 뺨을 잠시 손바닥으로 쓸다, 석율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 여전히 미동 없음. 이걸로는 안 깬다 이건가. 촉,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석율의 입술이 이번에는 백기의 입술을 아예 삼켰다. 숨마저 앗아버릴 기세로 입술을 부딪치고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어 입 안을 범한 그 순간,

“으응…!”

백기가 눈을 떴다. 침대에 옆으로 걸터앉아선 불편하게 상체만 틀어 키스하던 석율은 순식간에 백기의 위로 올라 탄 자세를 취하고 백기의 양 팔목을 단단히 쥐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반항 불가 상태가 되어 버린 백기가 다리를 움직여 보지만, 술에 절어서 얼마 전까진 움직이지도 못한 몸이다. 훗 코웃음을 친 석율이 능숙하게 제 다리를 백기의 다리와 얽었다. 집요하게 입술을 물고 늘어지던 석율의 입술이 떨어진 순간 참았던 소리를 지르려던 백기는, 저를 내려다보는 석율의 시선에 얼어붙었다. 온통 젖은 입술만 파르르 떨며 석율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맹수 같은 눈빛을 한 이 남자가 한석율이라고? 백기가 아는 한석율은 매일 실없이 웃음이나 뿌리고 다니고, 다이내믹하게 감정을 표현하며 천진한 언어 구사를 하던 남자다. 시퍼렇게 날이 서서 누군가를 잡아먹으려 드는 짐승이 아니라. 짐승이, 아니, 석율이 표정 변화 없이 입만 열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할까.”
“…….”
“무서워요?”

너 같으면 안 무섭겠습니까. 나도 나름 남잔데. 지금 상태로 봐선 아무리 반항을 하고 싫다고 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걸 안다. 얼마나 꽉 쥐고 있는지, 피가 안 통해서 이젠 저릿저릿해져오는 손 때문에 백기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좀 놔 봐요. 아픕니다.”
“싫은데.”
“한석율 씨.”
“때리고 도망갈 거 아닙니까.”
“안 때릴 테니까, 좀… 놓으라구요.”

순순히 놓아준 석율 덕분에 백기는 자유로워진 손을 쥐락펴락하며 생각에 잠겼다. 기억이 어디에서 끊겼는지 거꾸로 되짚는 백기를 석율은 그저 내려다볼 뿐. 울리는 머리에 끄응,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난다. 일단 오늘은 목요일이고, 해준이 시킨 일을 마저 끝내느라 조금 늦게까지 사무실에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석율도 어디서 짠 하고 나타나서는…

- 잔업해요? 퇴근 안 해?
- 방금 끝났습니다.
- 술 한 잔 해요.
- …금요일 아닌데요.
- 술은 뭐, 금요일에만 먹어야 된다는 법 있어요? 거 참 이상한 법이네.

그러면서 참 예쁘게도 웃던 석율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따라 웃으며, 백기는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같다. 해준의 책상 위로 숙제가 담긴 USB를 놓아두고 코트를 입은 백기가 가방을 들었다. 못내 맘에 걸리는 듯, 자꾸 시선이 해준의 책상으로 향한다. 가방이 있는 걸 보면 아직 퇴근은 안 한 것 같은데… 어디 가신 거지. 그런 백기를 재촉하듯 석율이 백기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어, 하는 사이에 엘리베이터에 태워져서 실없는 농담을 들었던 것 같다. 장백기 씨 손목 되게 가늘다. 손가락도 예뻐. 라는. 그리고 저번에 갔던 술집, 같은 테라스 자리에서.

- 장백기 씨.
- 말해요.
- 강 대리 좋아하죠?
- 컥! 큽!

넘어가던 술이 도로 올라왔다.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고 황당한 눈길로 석율을 보는데, 석율은 웃고 있지 않았다. 순간, 조급해졌다. 그렇게 티가 났나 싶었다. 당사자인 백기도 자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타인인 석율이 알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이렇게 확신을 갖고.

- 대답 안 해도 알겠네.
- 한석율 씨.
- 걱정 마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그냥 물어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힘들겠다 싶어서.
- ……뭐가 말입니까.
- 여러 가지로.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반쯤 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들키지 말아야 할 비밀을 누군가가 알아버린 이 상황에서, 그 누군가가 석율이라는 사실에 백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불안해야 하는데. 아니라고 부정 한 번 못하고 인정해 버린 건데. 그래서 마음을 놓았던 게, 화근이었다.

“…기억났나 보네.”
“한석율 씨, 저는…”
“대답은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대답 원하고 데려온 건 아니거든.”

석율은 백기를 내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이 상황과 참 안 어울리는 미소인데다 소름끼칠 만큼 차갑다. 귓가에 맴도는 석율의 고백이 저를 괴롭히기도 했다. ‘장백기 씨. 그냥 나한테 와요. 위로라고 생각하고.’ 백기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석율과 눈을 맞췄다.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저를 보는, 낯선 눈이 어딘가 모르게 슬프다.

“…후회, 할 겁니다.”
“어이구, 내 걱정도 해 주는 건가?”
“한…”
“필요 없다고 한 것 같은데. 응. 후회든 삽질이든 내가 하니까, 백기 씨는 신경 꺼요. 눈 감고, 날 강해준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

다시 입술이 닿았다.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는 듯 석율의 입술이 말도 숨도 망설임도 모두, 앗아간다. 허공을 맴돌던 시선은 이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가려졌다.




석율은 까무러치듯 잠에 빠진 백기의 부은 눈을 가만히 매만졌다. 아직도 젖어 있는 눈가는 발갛게 달아올라 열을 품은 채다.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던 백기의 안처럼. 불쑥 치고 올라오는 열기를 해소하기 위해, 담배를 물었다. 아… 하고 나서 바로 담배 무는 건 나쁜 남자라고 하던데.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석율이 한 쪽 입술을 비스듬히 올린다. 어차피, 해준을 맘에 담은 백기를 눈에 들인 순간부터…

“후우…”

포기했다. 그런 건.


**


무슨 정신으로 출근을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벌써 열 번은 떨어뜨린 것 같은 펜을 다시 주워 들다, 백기가 윽 하고 입술을 물었다. 온 몸이, 아주 난리다. 삐걱삐걱, 로보트도 아니고 이건 뭐.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욱신하고 움직일 때마다 징징 울리고. 최대한 주위에 들리지 않게 깊게 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손목에 옅게 든 멍이 보일까, 괜히 셔츠 소매를 좀 끌어내리는 백기를 해준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저번에 갔던 데 갈까요?
- ...네.

어젯밤, 장백기는 한석율과 같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어제 입었던 정장에, 맸던 넥타이 그대로 출근했다. 해준의 시선이 백기의 얼굴에서 셔츠 카라 위의 목덜미로 향했다.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위치에, 흔적이 보인다. 잘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지만, 공교롭게도 해준은 백기의 바로 옆자리였다.

"장백기 씨."
"네?"
"....어디 아픕니까."
"아, 닙.. 니다. 대리님."

해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대답하는 백기.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선이 백기가 지금 얼마나 불안한지 보여주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해준이 뭐라고 하려고 입을 연 순간,

"백기 씨, 잠시만."
"네?"

석율이 들어왔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강 대리님, 잠시 백기씨 좀 빌려가겠습니다. 하며 백기의 손목을 쥔 석율이 해준과 눈을 맞춘다. 당황한 백기가 석율의 손을 떼어내려 끙끙대지만, 어림도 없었다. 해준이 답을 하건말건, 석율은 막무가내였다. 가 보세요. 급한 것 같은데. 해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석율이 백기를 잡아 끌고 사라졌다.

기분이, 좋지 않다. 까닭 모를 거북함에 해준이 습관처럼 두통약을 꺼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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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하게 추웠다. 눈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얼음이 남았고, 계속 최저기온을 찍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칼바람이 불었다. 12월 어플리케이션이라도 깔아둔 것 마냥, 12월의 첫날부터 뿅 하고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았다. 폭신폭신한 목도리를 하고 나왔는데도 사이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목덜미를 서늘하게 해, 백기는 자꾸 움츠러드는 몸을 의식적으로 곧추세웠다. 이런 날에 웅크리면 더 춥다. 그러다가 욱신거리는 몸 때문에 반사적으로 백기의 이마가 찌푸려진다.

아, 진짜. 한석율. 적당히 좀 하라니까. 오늘 현장 나갈 일이 있다고 한 건 석율이었는데, 당사자인 석율이 이상할 정도로 계속 저를 지분거리다 결국 연달아 두 번은 더 했더랬다. 짧게도 아니고 길게. 아무리 둘 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고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몸이라고 해도 그 정도면 지친다. 백기는 뇌 속을 녹일 것 같던 길고 지독한 쾌감에 침대에 엎어져 가쁜 숨을 내쉬며 작게 떨었다. 그런 저의 등허리를 따라 입을 맞추며 후희를 즐기던 석율은, 확실히… 이런 관계가 되고 나서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긴 했다. 덕분에 아침에 깨서 그 길지도 않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몇 번을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그러지 않아도 넓은 집인데, 욕실까지 가는 길이 구만리 같았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켜 놓은 백기가 곧장 탕비실로 향했다. 텀블러를 들고, 뭘로 할까 물끄러미 티백들을 훑는다. 조금 뒤 어, 백기씨. 일찍 오셨네요? 노래하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백기의 귓가를 두드렸다. 그래였다.

“아, 네. 장그래 씨. 좋은 아침입니다.”
“밖에, 되게 추웠나 봐요?”
“네?”
“코하고 볼, 빨개요.”

그러면서 생긋 웃는 그래를 보다 백기가 입술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장그래 씨 입술이 지금 나보다는 더 붉을 건데요. 한석율 그 인간이 그렇게 보기 좋다고 난리거든요. 그래씨 입술은 틴트 바른 것 같단 말이야, 라면서. 자꾸 다른 사람 입술 타령 하면서 키스를 하는 통에 기분 다 잡친 내가 그 입술을 콱 깨물어 주긴 했지만.

……? 제 얼굴에 머무는 백기의 시선이 점점 날카로워지자, 그래가 영문을 모르고 더듬더듬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뭐가, 맘에… 안 드시나?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닙니다.”
“아, 오늘 점심에 약속 없으면 점심 같이 하시죠. 한석율씨는…”
“현장 갔다가 오후 출근이라면서요. 셋이 먹죠 그럼.”
“네. 그럼 나중에 봐요.”

그리고 점심시간. 백기는, 간밤에 석율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굴었는지 알게 됐다.

“한석율씨는 이 추운 날에 현장이네. 생일 같지도 않겠어요.”
“……?! 생, 컥! 콜록!”
“백기씨, 괜찮아요? 여기 물.”

생일이라고? 잘만 넘어가던 밥이 목구멍에 턱 하니 걸렸다. 백기가 안경을 살짝 들추고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영이가 건네준 물을 마셨다. 생일이라니, 누가. 한석율이? 아니 근데, 왜 그걸 내가 이 사람들 입으로 들어야 하는데? 급격히 싸해지는 백기의 얼굴을 보고 그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아침에 탕비실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평소와는 좀 다른 백기가 신기하다. 물론 이유는,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어, 밥 벌써 다 먹은… 백기씨?”
“먼저 일어날게요. 할 일이 생각나서.”

그러곤 진짜로, 미련 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백기가 사라졌다. 남겨진 영이와 그래의 눈이 마주친다. 서로의 눈에 똑같이 떠오른 의아함에, 두 사람은 동시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봐도 할 일 생각난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오늘 끝나고 술 한 잔 할 거냐는 얘기 하지도 못했네요, 결국.”
“그러게요.”

그럼 나중에 카톡이라도 하죠, 뭐. 우리도 일어납시다. 커피 한 잔 하러 가요. 그래가 영이와 나란히 걸으며 폰을 꺼내들었다. 석율에게 아까 백기의 반응을 전해줘야 맞는 걸까 잠시 고민하다, 씩 웃으며 다시 주머니에 폰을 집어넣었다. 이러면, 더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아, 욕하고 싶다. 담배 피고 싶다. 욕을 하면서 아주 맛있게 담배를 피고 싶은 욕망을 겨우 눌렀다. 옥상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자니 머리 끝까지 올랐던 화가 조금 식는 것도 같아, 백기가 아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진정해야지. 진정…

“…에이씨, 진정은 개뿔. 하게 생겼어? 이게 진정할 일이야?”

뭐야, 대체. 왜 나 빼고 다 알고 있는 건데? 한석율 생일을 왜 애인인 나 빼고 다 아는 거냐고, 대체. 자기 집 침대 위에서 나랑 뒹굴 시간은 있는데 생일이란 말 한 마디 할 시간은 없든? 백기는 부재중 전화도, 카톡도 없는 폰이 마치 석율의 얼굴이라도 되는 양 매섭게 노려보다가 아-! 하면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석율의 탓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백기 역시 해준과의 관계가 조금씩 개선되며 하는 일이 늘어난 탓에 요즘 계속 바빴기 때문이다. 석율이 먼저 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물어봤어도 좋을 일이었고.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누가, 애인 생일을… 남이 말해 줘서 아냐고.”

……제일 먼저 축하해 줘야 할 사람이잖아요. 나는. 한석율씨. 이 나쁜 새끼야.




석율이 회사로 복귀했다. [백기씨, 다녀왔어요. 점심 챙겨 먹었어?] 카톡 옆의 시각은 두 시. 물론 답장은 안 했다. 그리고 지금 시간은 세 시. 또 폰 액정을 눈으로 깰 기세로 노려보는 백기를, 해준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점심시간 이후부터 계속 이 상태다. 이따금씩 입술을 깨물고 한숨을 쉬고, 폰을 노려봤다가, 다시 축 처져서 마른세수를 하고. 평소였다면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넘어갔을 자신마저 대체 무슨 일인가 할 정도로, 제 부사수가 이상하다. 해준의 시선을 느꼈는지 움찔한 백기가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저를 바라보는 해준의 두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뭐라고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백기를 위해 해준이 먼저 입을 뗐다.

“장백기씨. 오늘 무슨 일 있습니까.”
“……대리님.”
“말해요.”
“저… 그러니까, 그… 오늘만. 지금, 퇴근해도… 되겠습니까?”

해준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런 얼굴로 물어보는데 안 된다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장백기씨. 안 된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얼굴인데요. 속으로 한숨을 쉰 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퇴근하세요. 요즘 계속 바빴으니까 오늘 정도는 빨리 가도 좋겠죠. 해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언제 울상이었냐는 듯 환해지는 하얀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 웃음에 해준마저 무심코 웃어버릴 정도로, 밝은 미소였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연신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부리나케 가방을 챙기고 겉옷도 그냥 든 채로 뛰다시피 사무실을 나가는 백기의 뒷모습을 보던 해준이 결국 피식 웃었다. 귀엽네.




백기는 사옥을 나오자마자 곧장 뛰어서 근처 베이커리로 들어가 케이크를 샀다. 사고 나와서는, 지각했을 때나 타던 택시를 잡았다. 세 시 십육 분. 밀릴 시간은 아니니까 자취방에 먼저 들렀다가, 그거 챙겨서, 나와서 다시 석율씨네 가서… 백기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폰을 잠금 해제한 백기가 곧장 전화를 걸었다.

“응, 나야 엄마. 엄마, 미역국 어떻게 끓이지? …아프냐고? 아프긴 누가 아파요, 그냥 갑자기 먹고 싶어서. 아냐, 오실 필요는 없고 내가 그냥 해 먹을래요. 재료랑 넣는 순서만 가르쳐주면 내가 할게. 응.”




아무리 기다려도 카톡 답, 없음. 전화, 없음. ……. 뭐지. 이 위화감은. 석율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슬며시 자리를 일어났다.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가 철강팀 사무실을 멀리서 살피는데, 백기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엥? 뭐야. 왜 자리에 없어. 어쩔까 고민하던 석율이 빠른 걸음으로, 그러나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해 가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노트북, 꺼져 있음. 곰돌이 컵, 깨끗함. 가방 없음, 코트도 없음……? 통화를 막 끝낸 해준이 석율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 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 네, 어… 백기 씨…는, 자리에 없네요?”
“퇴근했습니다.”
“……퇴근, 이요?”

퇴근? 퇴근이라고 하셨습니까? 석율의 눈이 커지고 얼굴 가득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확 드러날 정도의 변화에 해준이 한 쪽 눈썹을 올렸다. 오늘 무슨 날인가. 백기도 그렇고, 석율도 그렇고 둘 다 왜 이럴까. 이상한 해준의 시선은 느끼지도 못하는 듯, 석율은 초점 없는 시선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사라졌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인사는 잊지 않았지만, 나가다 출입문에 이마를 박은 것만 봐도 지금 석율은 제정신이 아니다. 어쩌면, 전혀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들이 유기적인 관계일 때가 있는데…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해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백기야, 퇴근했어? 어디 아파?]
[전화 좀 받아봐.]
[장백기. 예쁜아.]



“와, 나, 미치겠네 진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모든 힘을 실어서 한 대만 명치를 세게 올려쳐 주고 싶은 사람이자 옥탄 같은 성준식은 또 석율에게 일을 떠넘겼다. 문제는 그 일이 아무리 생각해도 정시에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것. 생일에 월차 내고 쉬어도 모자랄 판에 현장까지 갔다 왔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야근이요?”
“…성대리님이에요, 또?”
“망할 성시오패스, 내가, 어휴, 아오. 아오 ㅆ…!!!”

그럼 술 약속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네요. 쓴웃음을 지은 영이의 말에 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럼 먼저 가볼게요. 하 대리님 회의 들어가셔서. 한석율씨, 힘내요.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멀어지는 영이를 보다 석율이 결국 휴게실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애인은 카톡도 씹고, 전화도 안 받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나오는 건 한숨뿐. 그래는 석율을 조용히 내려다보다,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석율을 불렀다.

“한석율 씨.”
“왜, 그래.”
“…장백기 씨한테 말 했습니까?”
“응? 뭘.”
“오늘 한석율 씨 생일인 거.”
“…….”

콰과과광. 아마 지금 배경음악을 깔아야 한다면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겠지. 벌떡 일어난 석율이 잠시만, 잠시만? 하더니 휴게실을 누비며 기억을 되짚었다. 하려고 했는데, 요즘 둘 다 바빠서… 그리고 어제 하려고 했는데 오늘 현장근무 한다는 거에 좀 열도 받았었고, 백기와 몸을 맞대는 것도 오랜만이어서… 어…?

“망했다….”
“점심 먹으면서 말 꺼냈더니, 백기 씨 얼굴이 굳어지더라구요.”
“아, 진짜, 아- 아, 진짜 엿 같네…”
“…….”

석율은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아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어쩐지, 뭐가 계속 맘에 걸리더라니. 그냥 현장 가서 너무 바빴던 탓에 연락을 못 한 것 때문에 화가 났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럴 시간 있습니까?”
“뭐가아아아.”
“저라면, 야근 안 합니다. 어떻게든 빨리 끝내 놓고, 집에 가겠어요.”

시간 아까우니까, 빨리 가서 일하시죠. 힘내요. 석율의 등을 쫙, 하고 후려친 그래가 갑니다, 하고 사라졌다.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다. 아, 진짜… 예쁜 사람이 예쁜 짓만 골라 하네. 장그래씨. 뭐, 그래도… 우리 백기씨가 더 예쁘긴 하지만. 그래가 들었다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하는 표정을 지었을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석율이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미역국 OK. 밥 OK. 밑반찬이야 석율의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것들이 냉장고에 아직 한가득이다. 테이블 한가운데에 케이크를 올려놓은 백기가 그제야 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카톡, …난리 났네. 손가락을 움직여 한 마디, [퇴근하면 집으로 곧장 올 것.] 라는 카톡을 보내 놓고 욕실로 들어간다. 옷을 벗다 말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하얀 몸에 찍힌 울긋불긋한 흔적이 보여 멈칫. 순간 어제 저를 뜨겁게 안던 석율이 떠올라, 몸을 타고 저릿저릿한 감각이 올라와서 백기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변태도 아니고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그나저나, 손가락이 좀 아프다. 역시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수십 번 정도 연습을 하니 몸이 저절로 기억해서 다행이지만. 석율이 안 좋아하면 어쩌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도리질 친 백기가 샤워를 시작했다. 창밖으로는 조금씩 어둠이 내리는 중이었다.


그래의 말대로, 석율이 전에 없던 집중력으로 간신히 일을 끝냈을 때 시계는 여섯 시 이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카톡을 확인하고는 나 지금 퇴근! 이라고 답을 해 놓고 택시를 잡아타고 나름대로 지름길로만 달려 집에 도착한 석율이 도어락을 풀고 들어서자마자 백기를 불렀다. 예쁜아. 백기씨?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서니 테이블에 뭔가를 놓고 있는 백기가 눈에 들어왔다. 석율이 선물했던 하얀 앙고라 니트에 수면바지를 입은 백기가 힐끗 석율에게 시선을 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와서 밥 먹어요. 조금 뾰로통하면 어떠랴. 오늘 내내, 그렇게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다. 가방을 휙 던져 놓은 석율이 걸어가 백기를 품에 안았다. 싫지는 않은지, 밀어내지 않고 제 어깨에 고개를 묻는 백기를 더 세게 안으며 귓가에 속삭인다. 보고 싶었어. 내 꺼. …나 왔는데, 다녀왔습니다 뽀뽀 안 해줘?

“…미워서 안 해 줄 겁니다.”
“……화 많이 났어?”
“…….”

석율의 물음에도 아무 답 없이 한동안 안겨 있던 백기가 고개를 들었다. 흠칫 놀라며 눈을 치켜뜨는 석율의 목을 감고 그대로 키스하는 백기 덕분에 석율의 몸이 순간 경직된다. 입술을 깨물고 핥고, 도망치는 혀를 끝까지 쫓아가 기어코 제 입술로 빨아들이는… 말 그대로, 키스였다. 너무 당황해서 눈도 감지 못한 석율에게, 입술을 뗀 백기가 숨을 섞어 낮게 말했다.

“내가. 내 애인 생일을. 다른 사람 입으로 들어야 합니까?”
“…백기야. 예쁜아, 그게.”
“알아요. 우리 둘 다 바빴으니까. 나도 안 물어본 거 잘못했고. 그래도, …힌트라도 줬어야죠.”
“……미안.”
“알았으면 됐어요. 밥이나 먹어요. 미역국은 먹었어?”

맛없어도 책임 못 져요. 백기가 말하고 나서야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들이 자신의 생일상이라는 걸 안 모양인지, 석율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거… 이거…

“이거 뭐요.”
“……예쁜이가 한 거야?”
“그럼 뭐, 나 말고 집요정이라도 키웁니까?”

됐고 빨리 밥 먹어요. 나 무지 배고파.



후식은 자기가 준비하겠다며, 석율이 케이크를 자르고 커피를 내리는 사이 백기가 구석에 감춰 놓았던 걸 꺼내놓았다. 실수하면 안 되는데…. 손을 쥐락펴락, 손가락 운동도 해 본다. 예쁜아, 거기서 뭐해요. 케이크 먹자. 등 뒤로 석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나도 몰라. 모르겠다 이제. 질끈 눈을 감고, 백기가 걸어가 석율의 앞에 앉았다.

“……지금 들고 있는 거, 기타 아니야?”
“기대하지 마요. 나 기타 몇 년 만에 잡아본 거니까. 그냥 들어. 말하지 말고.”

웃기면 웃어도 되는데, 다 끝난 다음에 웃어요. 마지막으로 엄포를 놓은 백기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한 번 심호흡을 크게 한 백기의 손가락이 기타를 연주하고, 이윽고 입술 사이에서 노래가 흘렀다.

내 뜨거운 입술이 너의 부드러운 입술에 닿길 원해
내 사랑이 너의 가슴에 전해지도록…
아직도 나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다면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널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겠어, 언제까지나
널 사랑하겠어, 지금 이 순간처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널 사랑하겠어…

석율의 표정을 보는 것이 두려워,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노래를 끝내고 나서야 백기는 슬쩍 눈만 치켜떠 석율을 살폈다. ……반응을 좀, 하지 그래요…? 저기요? 기타를 내려놓고, 석율이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가는데 석율이 백기의 허리를 잡아 휙, 하고 끌어당겼다. 그러니까 지금 자세가, 석율의 허벅지 위에 앉은… 조금… 민망한 자세다.

“…뭘 믿고 이렇게 예쁘냐, 장백기.”
“무슨…”
“……진짜 너, 심장에 안 좋을 정도로 예뻐.”
“뭐라는 겁니까. 내년 생일엔 좋은 거 선물해 줄게요.”

필요 없어. 내년 생일에도, 그 다음 생일에도, 너만 있으면 되니까. 이마를 맞대고 속삭이는 석율의 달콤한 목소리에 백기가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생일 축하해요. 석율씨.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댔다.

진짜로,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

소파에 앉은 채 키스를 주고받다가, 먼저 불이 붙은 쪽은 석율이었다. 니트 안으로 들어온 손이 끈질기게 가슴팍과 허리를 쓸자, 백기도 항복. 소파에서 일을 치룰 기세인 석율을, 백기가 애교 섞인 키스로 겨우 달래 2층까지 올라왔다. 침대에 저를 눕히고 이곳저곳 키스를 퍼부어 오는 석율의 머리칼에 손을 넣어 헤집으며 백기는 눈을 감았다. 생일이니까, 좀 봐 주지 뭐.

... 는 무슨. 인간아, 정도를 좀.. 지키라고!


"하아, 흐, 석율-.. 좀.. 아..!"
"미안, 후으, 자제가 안, 된다. 그러게, 누가-"
"흐으..!"
"예쁜 짓, 하래?"

그게 누구 때문인데..! 어제도 할 만큼 해놓고서, 대체, 이 인간 체력의 끝은 어디인가. 정신없이 포인트만 찔러대는 통에 흐르는 생리적인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백기가 손을 뻗었다. 안아줘요. 무언의 몸짓을 캐치한 석율이 씩 웃으며 백기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 끌어당겼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몇 번 반복하다 키스가 되었다. 입 안의 여린 살을 훑어내는 석율의 혀에, 백기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까지 남김 없이 혀로 핥아낸 석율이 귓가에 속삭였다. 고마워. ...사랑해.

그 말에 백기도 다시 무너진다. 치사하게, 이럴 때 그런 목소리로 말하다니.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석율의 두 뺨을 감싼 백기가 입술을 맞댄 채 답했다. 내가 더 고마워요.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석율의 생일이 막 지나간 밤이었다.

 

by R_i_a_n 2015. 4. 27. 21:52

* 너의 모든 순간 (달아요 외전)


으응. 우으… 바스락. 봉긋한 시트 속에서 쏙, 하고 백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잠이 잔뜩 묻은 나른한 눈을 깜빡이며 아직 어둑어둑한 주위를 살피다, 이내 다시 고개를 베개에 파묻는다. 코끝에 닿는 익숙한 해준의 냄새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샌다. 어제 처음으로 해준의 집에서, 그리고 온전한 해준의 공간인 침실에서 몸을 맞댔다. 백기는 들어오자마자 저를 감싸는 해준의 향기에 정신을 못 차렸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장해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다가, 해준이 제 뺨에 손을 댔을 때는 열이 화르르 올라 그의 품으로 무너졌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해준도 평소와는 좀 달랐던 것도 같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기억이 날아간 부분들도 꽤 있지만, 흐릿하게 머릿속을 스치는 해준의 모습은… 끄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백기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기절하듯 잠들어 놓고 겨우 일어나서 할 생각은 아니다. 심장에 안 좋아. 응. 결론을 내리곤 고개를 주억거리는 백기의 허리에, 해준의 탄탄한 팔이 감겨 왔다.

“아… 죄송해요, 저 때문에 깨신…”
“일어나자마자 혼자서 뭐가 그렇게 바쁩니까.”

이 쪽 봐요. 조금 가라앉은 해준의 목소리가 좋아서 잠시 넋을 놓고 있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백기의 입술에 촉, 촉, 하고 해준이 짧게 키스했다. 떨어지는 입술이 아쉬워 이번엔 백기 쪽에서 세 번. 쪽쪽쪽. 닿은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온다. 자느라 흐트러진 백기의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주며, 해준이 백기의 얼굴을 살폈다. 눈, 부었네요. 안 아픕니까. 해준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눈가를 쓸어와, 백기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눈 위로 말랑말랑한 입술이 닿는다 싶더니 말캉하고 따뜻한 혀가 느껴졌다.

“흐으… 간지러, 워요. 대리님.”
“빨리 가라앉으라고 이러는 겁니다.”
“병 주고 약 주시는 겁니까?”
“쿡… 그래서, 싫었습니까?”

싫은 사람치고는 어제 꽤 적극적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군요. 이어지는 해준의 담담한 말에 말려들어 페이스를 잃은 백기가 윽, 하곤 입을 다물었다. 금세 빨갛게 물들어선 원망스러운 눈길로 저를 쳐다보는 백기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해준이 다시 웃는다. 아, 진짜. 그렇게 웃는 건 반칙이라구요. 화도 못 내지 않습니까. 차오르는 말들을 입 밖으로 차마 꺼내 놓지 못하고 백기는 입술만 삐죽였다. 해준은 백기가 토라졌다고 생각했는지, 물끄러미 백기를 바라보다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귀여웠습니다.”
“네에?”
“어제.”
“무…!”
“…아니. 그것보다는 섹시했다고 하는 편이 맞는 것 같기도 하네요.”
“으, 아, 돼, 됐습니다! 대리님, 됐으니까…”

그냥 암말도 마십쇼… 으으… 결국 귀까지 빨갛게 익은 백기가 해준의 등에 팔을 두른 채 어깨에 고개를 묻는다. 해준이 피식 웃고는 백기의 등을 느리게 토닥였다. 아이를 재우듯, 새근새근한 숨소리에 맞춰서. 이러다 또 잠들 것 같아 밀려오는 잠을 고개를 흔들어 떨쳐낸 백기가 해준을 올려다봤다. 동그랗고 큰 눈, 손대면 베일 것 같은 콧날, 자신을 너무나 쉽게 흔들어 놓는 입술, 그리고

“…왜 그렇게 쳐다봐요.”

국어를 하든, 외국어를 하든, 욕을 하든, 듣는 것만으로도 섹시한 목소리. 귓가에서 속삭일 때면 항상 이성을 훌쩍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 놓는 것만 같은 해준의 목소리가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독점하고 싶을 정도로. 해준이 자신의 물음에도 뚫어져라 제 얼굴을 보고 있는 백기의 모습에 의아한 듯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래도 재촉할 생각은 없는지, 백기와 가만히 눈을 맞춘 채 하얀 볼을 매만진다. 해준의 큰 손에 볼을 마주 부비며, 백기가 눈이 휘어지도록 환하게 웃었다.

“멋있어서요.”

백기의 말에 해준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아부해도 나올 거 없습니다. 조금 장난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제 이마에 입술도장을 찍어 주는 해준 덕분에, 간지러운 감각이 차오른다. 달달하고, 포근하다. 연애를 시작하고 문득문득 찾아오는 불안감은 이게 꿈이라면 제발 깨지 않기를 바라게 했다. 원인터의 대리가 아닌 그냥 남자 강해준을 제일 가까이서 독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백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만큼 무서웠기에. 그러나 해준이 이렇게 다정하게,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이 따뜻하게 저를 안고 만져줄 때면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좋아서, 머릿속이 온통 강해준이라는 남자로 가득 차게 되니까. 생각에 빠져 있는 백기의 목덜미를, 해준이 따뜻한 손으로 쓸며 물었다.

“배 안 고픕니까.”
“…고파요. 맛있는 거 먹고 싶습니다.”
“옷 입고, 씻고 나와요.”

네에. 느릿느릿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옷을 입기 시작하는 백기의 허리에 머물던 해준의 시선은, 백기가 욕실 안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따라붙었다. 불투명한 물소리에 해준이 몸을 일으킨다. 자주 입는 티셔츠에 니트 카디건을 걸치고 일어서자 제법 찬 공기가 닿아왔다. 해 뜰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흐린 건가 생각하며 블라인드를 올린 해준의 눈에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보였다. 눈이라도 오려나.


**


사 먹으러 밖으로 나가려나, 하는 백기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씻고 나와 약간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던 백기의 눈에 보인 건, 요리하는 남자의 뒷모습. 아까까지만 해도 약간 싸늘하던 집 안의 공기는 해준이 요리하고 있는 덕분인지 적당히 따뜻해졌다. 발에 못이라도 박힌 듯, 백기는 멍하니 자리에 선 채로 해준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힐끗 고개를 돌린 해준이 백기를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그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서 뭐 합니까. 이리 와요.”
“네? 아, 네. 네.”

해준의 부름에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걸어간 것까진 좋았는데, 해준의 옆에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백기의 모습에 해준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백기씨. 지금 제 앞에서 재롱떠는 겁니까? 강아지에요?

“네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저, 제가 도울 일이라도…”
“다 했습니다. 맛있게 먹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대리님, 요리도 하십니까?”
“못 할 줄 알았습니까?”
아뇨!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진짜, 너무… 왜 그렇게 완벽하십니까. 고개를 세차게 젓다가 배시시 웃으며, 용케 해준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백기가 한 말에 해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소녀 같은 제 애인은 가끔 이렇게 가감 없이 솔직하게 굴 때가 있다. 특히 감정에 관한 한, 놀랄 만큼 비밀이 없었다. 회사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삼키곤 했던 과거의 반작용일까. 단 둘이 있을 때는 해준이 신기하게 여길 정도로 직설적인 표현을 썼다.

좋아합니다.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계속, 쭉, 봤으면 좋겠어요.
대리님 일 하고 계시는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가끔 어지러워요. 너무 멋있어서.
대리님이랑 있으면 진짜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빨리 뜁니다. 살아 있는 게 새삼 실감이 날 정도로요.
…사랑해요.

저를 보는 두 눈은 항상 반짝반짝. 별이라도 품고 있는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그 눈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가득 차오르는 감정에 해준마저 혼미해지곤 했다. 사실은 백기가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속삭여주고 싶었다. 예쁘다든가 귀엽다는 그런 상투적인 말 말고, 내 곁에 와줘서 고맙다고. 영원이라는 게 있다면, 앞으로 내가 너를 사랑할 날들이라는 가슴 벅찬 고백을. 그러나 그렇게 입 밖으로 내면 정말 자제하기 힘들 것 같아서 해준은 그저 눌러 담을 뿐이었다. 강해준의 세상이, 그리고 그 세상의 법칙이 장백기라고 말하면, 어린 연인은 부담스러워서 도망가 버릴지도 모르기에.

생각에 빠진 해준을 물끄러미 보던 백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무데도, 안 갑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저 여기 있어요. 제 자리는, 대리님 옆입니다. 아무데도 안 가요. 떼어놓으시려고 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해준이 뜬금없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는 듯 백기의 눈을 마주 보고는 침묵을 지켰다. 백기는 해준의 입술에 살짝 입술을 대며 말했다.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대리님 눈을 보니까.”

정말, 어디까지 예뻐질 작정일까. 이 앙큼한, 소녀 같은 애인은. 저를 보며 웃는 백기의 입술에 해준이 이끌리듯 키스했다.


**


주말은 언제나 그렇듯, 특별히 하는 거 없이도 쏜살같이 시간이 흘러간다는 걸 실감하곤 한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해준은 블랙커피를, 백기는 우유를 넣은 카페라떼를 만들어 마시고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아 영화를 봤다. 다 보고 나서는 해준의 집에서 제일 근사한 서재에서 책을 몇 권 뽑아든 백기가 해준의 허벅지를 벤 채로 그 책들을 읽다가, 이제 막 잠든 참이었다. 해준이 읽던 책에 책갈피를 꽂아 두고 백기를 내려다본다. 가슴팍에 책을 꼭 안은 채로 잠든 백기에게서 안경을 조심스레 벗겨내고는 책도 살짝 빼서 테이블 위로 올려 두고, 해준은 가만히 백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내린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이 같다. 아직 덜 영글어진 소년 같아서, 저도 모르게 불쑥불쑥 위험한 충동이 드는 것이다.

지이잉. 테이블에 놓인 백기의 폰이 울렸다. 카톡이다. 무심한 눈으로 액정을 보다 다시 백기를 보려 했던 해준의 시선을, 이름이 붙잡았다. 한석율. 해준의 눈썹이 또 움찔, 한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망설임도 없이 백기의 폰을 손에 든 해준이 잠금을 풀었다.

[백기씨, 어디야? 집 안에 있으면 바깥 봐봐. 지금 눈 와요. 첫눈이야!]

……. 으응… 잠결인지 몸을 뒤척이며 백기가 해준의 허리를 꼭 안아 온다. 한 손으로 그런 백기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해준이 폰을 조용히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 날. 그러니까 해준이 백기를 처음 품에 안았던 날, 밤. 백기의 폰으로 자신에게 전화한 석율이 떠올랐다.

- 백기 씨가 보기보다 술에 많이 약해서요. 제 어깨 베고 잠들었거든요, 지금.
- ……그런데요.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가. 알아서 집에 바래다주면 될 것을, 왜 굳이 자신에게까지 전화를 한 건지. 해준의 대답에 묻은 짜증을 석율은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리고

- 근데 문제는 저도 많이 취해서 말입니다. 백기 씨 집까지 데려다 주지를 못 할 것 같아요. 그냥 제 집으로 데려갈까 하는데.
- ……!
- 후우… 강해준 대리님.
- …….
- 게임은… 공정해야죠. 전 분명 말씀 드렸습니다. 늦은 밤에 전화해서 실례 많았습…
- 거기 어딥니까.

기어코 해준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한석율은, 위험한 남자다. 어느 면을 보자면 해준 자신과 동류이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 좋다는 평판이 자자한 그 가면 아래로 본성을 눌러두고 있으니.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도 석율은 종종 백기에게 술 권유를 하곤 했는데,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백기가 석율에게는 유난히 경계를 하지 않는 걸 볼 때마다 해준은 좀 많이 답답해졌다. 제일 문제는, 백기가 정말로 순수하게 석율을 동기로 보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 혹여나 해준이 백기에게 ‘석율과 사적으로 만나지 말라’ 고 해도, 백기 입장에선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

뒤척이던 백기가 눈을 떴다. 안경이 없어 흐려진 눈을 부비며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해준이 폰을 건넸다.

“한석율 씨한테 연락 왔습니다.”
“……? 무슨…”
“첫눈이라고.”
“네?”

첫눈이 뭐가… 어… 첫눈? 백기의 눈이 동그래졌다. 반사적으로 창밖을 보는데, 저를 끌어당기는 손길에 반항할 새도 없이 그대로, 몸이 소파 위로 눕혀졌다. 그 몸 위로 해준이 올라앉는다. 당황했는지 백기가 입술만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해준을 불렀다. 저, 대리님…?

“왜, 첫눈인데 한석율 씨가 내 애인에게 카톡을 하는지. 납득이 가게 설명해 보세요.”
“예, 예에…?”
“500자 이내로 간결하게. 시간은 1분.”
“대, 대리님?”

1분은 너무 짧지 않습니까? 라고 하던 백기가 멈칫, 하며 해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가만히 눈을 맞추다가 손을 뻗어 해준의 잘생긴 얼굴을 매만지던 백기의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어쩌지… 어떡하지. 대리님이 귀엽다. 어떡하면 좋을까. 자꾸 새어나오는 웃음에 해준이 한 쪽 눈썹을 찌푸려도, 백기의 웃음은 이미 눈까지 반달처럼 접힐 정도로 환해져 있었다.

“왜 웃습니까.”
“귀여워서요.”
“누가?”
“…대리님이요.”

질투하는 남자가 추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데. 백기가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해준의 목을 감고, 아래로 끌어당겨 입술을 맞댔다. 아랫입술을 촉, 하고 빨아들이고 할짝할짝 소리가 나게 핥으며 애교 아닌 애교까지 부린다.

“…귀엽다고 했습니까.”

그럼, 이래도 귀여운지. 어디 한 번 봅시다. 백기의 애교 어린 키스를 받고 있던 해준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술을 집어 삼켰다.


**


“흐으, 강, 대리, 님… 하지, 마세요…”

절정 후 나른하니 풀어진 백기의 몸 중에 가장 예민한 부위는 귀였다. 해준으로서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제가 귀를 입술로 자극할 때 녹아내리는 백기 덕에, 괴롭히는 보람이 있다고나 할까. 그런 목소리로 말하면 신빙성 없는데. 무심한 듯 던지는 말이 귀를 타고 흘러드는 순간 백기가 바르르 떨며 해준의 어깨를 쥐었다. 항상 존대를 써 주는 해준이 잠자리에서 이렇게 한 번씩 말을 툭툭 놓을 때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러지 않아도 침대 안에서는 명령과 회유를 교묘하게 사용하는 해준이라서 더 그랬다. ……길들여지는 기분이 이런 걸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백기가 해준의 맨가슴에 이마를 콩- 하고 댄 채 투정을 부렸다.

“……첫눈, 보고 싶었는데.”
“아쉽습니까.”
“음… 조금요.”
“나갈래요?”
“누가 너무 괴롭혀서, 힘이 없습니다. 여기서도 보려면 볼 수 있잖아요.”

그리고 눈보다는 대리님이 더 좋으니까 괜찮아요. 대리님이랑 맞는 눈이 올해 첫눈인 거죠, 뭐. 재잘재잘 예쁜 말만 골라 하는 백기의 몸을 꼭 안으며, 해준이 잠시 숨을 골랐다.

“…장백기 씨.”
“네.”
“……사랑합니다.”
“…….”
“여기 있어줘서. 내 품에 와 줘서. 고마워요.”

해준의 품 안, 하얀 어깨가 떨린다.

“당신의 모든 순간이, 나였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어느 노래 가사가 이렇게 절절한 고백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다. 해준이 주는 쾌락에 방금 전까지 정신없이 울어 놓고도, 백기는 울컥 치받힌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항상 말보다는 행동으로 더 많은 걸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혼자서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힘들 때에도 말로 위로하기보다 다정한 키스로, 따뜻한 토닥임으로 저를 안아주던 이가 해준이었다. 그런 해준이 처음으로 한 고백에, 가슴이 벅차올라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끅끅거리는 백기를 살짝 품 안에서 떼어놓은 해준이 눈물로 흠뻑 젖은 두 뺨을 쓸었다. 쉽사리 그치지 않는 눈물에 오히려 백기가 더 당황해 입술을 달싹이는데, 해준은 그저 조용히 두 눈을 맞추고 기다렸다. 흐르는 눈물을 끊임없이 손으로 닦아주면서.

바깥엔 눈이 내려 천지가 하얗게 뒤덮인, 토요일의 늦은 오후였다.





+ 보너스 / 강대리님 집에 온 백기


해준의 성격답게, 딱 봐도 잘 정리되어 있는 집이다. 그렇다고 헤집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백기는 넓고 깔끔한 집 안을 눈만 또르르 굴려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백기가, 해준의 눈에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주인을 처음 만나 낯선 곳으로 온 강아지. 거실 소파에라도 앉아 있어요. 라고 짧게 말한 해준이 냉장고 쪽으로 가는 걸 보면서 백기 역시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걸어 거실로 향하는데,

두근.

……향, 이… 난다. 당연한 거였다. 여기는 해준의 집이니, 모든 공간에 해준의 향이 묻은 건. 그런데, 문제는. 그 향에 지금 자신이 이상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거였다. 해준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나는 것보다 훨씬 진하고, 위험하다.

“커피 마실래요?”
“네? 아니, 네… 아뇨, 아니, 괜찮습니다.”

무슨 대답이… 횡설수설 하는 백기의 대답에 냉장고를 열었다가 닫고 돌아본 해준이 한 쪽 눈썹을 올렸다. 기분 탓인가, 백기의 눈이 좀 풀린 것 같다. 얼굴도 좀 달아오른 것 같고. 술도 안 먹었는데, 왜일까.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지 걱정이 되어서, 해준은 성큼성큼 걸어 백기 앞에 섰다.

“어디 아픕니까?”
“흐으…”

정적. 볼에 손을 댄 것뿐인데 백기는 무슨 큰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해준의 품으로 무너졌다. 해준이 입고 있는 옷자락을 쥐고 숨을 고르다 기어코 울먹이며 도리질을 치던 백기가 입을 열었을 때,

“여기, 전부… 다, 대리님, 향기가 나서… 이, 이상해요…”

툭, 하고. 해준의 이성이 날아갔다. 그러니까 지금, 아픈 게 아니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훤히 보인다. 두 말 없이 백기를 가볍게 안아들고 침실로 걸어가는 해준의 얼굴에도 묘한 흥분이 어리기 시작했다. 강해준의 영역 중 가장 은밀한 중심부에 들어온거나 마찬가지인 백기는 이제 눈앞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침대 위에 백기를 눕힌 해준이 가만히 백기의 목덜미에 손을 댔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뜨겁습니까.”
“흐으, 죄, 죄송합니다…”
“정말로, 장백기 씨는…”

날 곤란하게 만드는 게 재주가 탁월하네요. 낮게 깔린 해준의 목소리가 죽을 만큼 섹시해서 백기가 바들바들 떨며 해준을 올려다봤다. 백기는 자각이 없겠지만 그 눈길은 무척이나 야해서, 해준이 자제력을 잃을 뻔 했을 정도였다. 옷을 벗겨내는 건 쉬웠다. 해준의 향기가 잔뜩 묻은 침대 위, 하얗고 말랑말랑한 몸을 쓸어내리며 해준이 속삭였다. 눈 감지 말고, 나 보세요.

겨우 뜬 눈을 다시 질끈 감으며 백기가 필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숨도 소리도 모두.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물린 백기의 입술 사이로 해준의 손가락 두 개가 파고들었다. 하악, 하아, 아, 웁… 억지로 벌려진 입술 사이로 소리가 터져 나온다. 해준은 그 상태로 입술을 하얀 가슴팍 위로 옮겼다. 움찔 튀어 오르는 허리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단단히 감고서는 혀를 놀리자 흐으으, 하고 반응하는 백기의 입 안을 손가락으로 헤집는다. 무얼 해야 하는지, 아이가 아닌 이상에야 알 수 있다. 백기도 혀를 움직여 해준의 손가락을 핥았다. 서툴기 그지없는 놀림이지만 정성스럽다. 상이라도 주듯, 해준이 한 입 가득 살을 베어 물었다. 아읍! 놀란 백기가 얼떨결에 해준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깨물었다고 해 봤자 간지러운 정도인데, 깨문 사람이 더 사색이 되어선 방금 물었던 자리를 할짝할짝. 불명확한 발음으로 죄송하다고 하며 손가락을 핥는 백기 덕분에 불이 붙은 건 해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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