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준백기(+석율)] 달아요

 

네 살 아래의 부사수는, 알고 보니 소녀였다. 제가 생각해도 좀 낯간지러운 문구를 떠올리며 해준이 피식 웃었다. 아침 햇살이 내려앉은 방 안, 침대 위에서 제 손가락을 꼭 붙잡은 채 자고 있는 백기를 보고 있자니…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자신은 잠이 깬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백기 덕분에, 해준은 여유롭게 하얀 얼굴을 감상할 수 있었다.

“…으응…”

그것도 잠시, 백기가 눈가로 닿는 햇살이 거슬리는지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고개를 움직였다. 입술도 달싹인다. 금방이라도 깰 것처럼 자꾸 뒤척이는 백기를, 해준이 끌어당겨 품으로 안았다. 저항 없이 품으로 쏙 들어온 백기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이는데, 움찔 하고 반응하는 몸. 깼나 싶어 백기를 부르려던 해준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오른 백기의 귀를 보고 소리 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큭.

“일어났습니까.”

“으… 아… 가, 강… 대리님…”

“잘 잤어요?”

“……네에.”

해준의 어깨에 고개를 묻다시피 한 백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악,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아.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속으로 난리가 났을 백기를 달래듯 해준이 백기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제야 빼꼼, 하고 고개를 든다. 그러나 해준의 눈을 보자마자 다시 화르르 달아오르는 백기 때문에 곤란해진 쪽은 해준이었다. 분명히 밤에 더한 것도 한 것 같은데, 이렇게 아이같이 굴면…

“장백기 씨.”

“네, 네?”

“…….”

“……? 강… 대리, 흡…”

아이를 데리고 나쁜 짓을 한 것 같잖습니까. 속으로 말을 삼킨 해준이, 멍하니 저를 부르는 백기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파드득, 놀란 백기의 손에 느릿느릿 손가락을 얽자 흐으응… 하고 비음이 샌다. 손이 예민한 건가. 간밤에도 깍지를 낀 채 손가락을 깨물고 핥았을 때 유난히 녹아내리던 백기가 해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손끝에 닿는 보드라운 손등을 쓰다듬으며 도망가려는 백기의 혀를 살짝 물었다가 입술로 갖고 놀듯 빨아들이니, 품 안에 갇힌 백기의 몸에 힘이 풀렸다. 그 와중에도 해준의 손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놓지 않은 채로. 굿모닝 키스 치고는 조금 진한 키스가 끝나자마자 백기는 차오른 숨을 뱉어냈다. 하아… 당황해서 그런 건지, 부끄러워서 그런 건지. 어느새 속눈썹에 살짝 맺힌 눈물을 본 해준이 두 눈 위로 가볍게 입술도장을 찍었다. 촉, 촉.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백기를 위해, 해준이 말문을 뗀다.

“걸을 수 있겠습니까.”

“에?”

“샤워.”

“아? 아, 아… 으… 네.”

“쿡… 그래요.”

그럼 먼저 씻겠습니다. 해준이 몸을 일으킨 덕에 드러난 탄탄한 상체가 눈에 보이자 백기가 화들짝 놀라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단조로운 발소리가 멀어지고,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백기는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발만 버둥버둥거리며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물론, 최대한 작게. 그러다가 예고 없이 찾아온 아래의 통증에 윽, 하고 정지 상태가 되어선 또 다시 화르르 붉게 물든다. 진짜… 꿈이 아니었구나. 죽을 만큼 부끄러운데, 그런데, 그것보다 더… 막… 너무… 너무 좋다. 끄으으… 어떡해… 꼬물꼬물, 시트에 감싸인 하얀 몸이 점점 웅크러든다.

그러니까, 이렇게 된 건.

 

**

 

옥상. 잠시 담배를 피러 갔는데 마침 석율이 있었다. 까딱,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석율이 손을 들어 흔들흔들. 그러곤 덧붙였다.

“백기씨, 오늘도 예쁘네.”

“…뭐 잘못 먹었습니까?”

“아아니? 멀쩡한데? 아~주 멀쩡해. 응. 아임 파인! 굿!”

“…….”

또 성대리님한테 깨졌습니까? 라고 물으려다 입을 다문 백기가 물끄러미 석율을 바라봤다. 기분 탓일까, 석율의 얼굴이 평소보다 그늘져 보여서 말을 붙이기가 어렵다. 흐르는 침묵이 좀 어색했던 백기는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석율을 불렀다.

“한석율 씨.”

“응.”

“…술 한 잔 할래요?”

“…….”

“……?”

“지금 나 꼬시는 거야?”

에에? 어이없다는 듯 올라가는 어조와 눈꼬리에, 석율이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 농담. 음… 고마워요.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칼퇴 해야겠네.

“근데, 괜찮아? 나랑 술 마셔도.”

“…뭐가요?”

“불금인데. 아… 백기 씨 여친 없지, 참.”

“……그러는 그쪽은.”

에이이, 발끈하기는. 성큼 다가와 백기의 머리를 슬쩍 건드리며 석율이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그럼 나중에 봐. 카톡할게. 그제야 평소의 석율을 보는 것 같아, 백기도 따라서 설핏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둘 다 일 때문에 칼퇴근은 무슨,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만날 수 있었지만.

 

 

석율은,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은 사람이다. 말재주도 좋고, 유머감각도 뛰어나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데에도 능숙하다. 스킨십도 어찌나 자연스럽게 해대는지, 사내에서 유일하게 저를 막 건드리는 사람이 바로 석율이었다. 손, 손목, 팔뚝 안쪽까지. 화들짝 놀라 떼어내 놓고 아, 너무 심했나? 하고 생각하는 저에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하던 말을 계속 하는 석율이, 백기는 신기했다. 그래서인지 석율과 술을 마실 때는 자제라는 걸 잊고는 했다. 결국 불타는 금요일 밤 술자리에서 먼저 취한 쪽은, 이번에도 백기였다. 기분 좋게 나른해진 백기를 보던 석율이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강 대리님이랑은 어때?”

“뭐가아… 말입니까.”

“사우나 텄다며. 둘이 데이트도 했다며, 반포대교에서어~”

“…데이트는, 무스은. 그런 거 아니에여…”

똑-같은데요, 뭐어… 하며 쓴웃음을 짓는 하얀 얼굴에 스치는 실망을, 석율은 놓치지 않았다. 뭐야. 둘이 술도 마셨다며. 그 정도 무너졌으면 더 가까워져야 하는 거 아닌가. 강해준 대리님, 진짜 무심하시네. 이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백기의 모습에 석율이 자리를 옮겨 앉았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백기의 고개를 제 어깨 위에 안착시키자 백기가 으으응- 하며 볼을 부벼온다. 거, 술버릇 한 번 위험하네. 소주도 아니고 맥주밖에 안 마셨으면서. 픽 웃은 석율이 그래요, 그래요. 강 대리님 때문에 많이 섭섭했어, 우리 백기씨? 하고 아이를 어르듯 속삭였다. 금세 색색 소리를 내며 기대 잠든 백기가 깨지 않게 손을 움직여 백기의 폰을 꺼내든다. 지금 시각은 밤 열한 시 반. 통화목록엔 보나마나 없을 거고. 주소록을 뒤질 것도 없이, 띄우자마자 보이는 ‘강해준 대리님 철강 1팀’ 이라는 문구. 피아노를 치듯 테이블을 한동안 두드리던 석율이 꾹, 하고 그 위를 눌렀다. 이 전화 안 받으면, 이대로 내가 채갑니다. 셋, 둘, 그리고 하나를 세기 전 목소리가 들렸다.

- 무슨 일입니까.

아깝다. 석율은 츳, 하고 짧게 혀를 찬 뒤 입을 열었다. 강해준 대리님? 잠시 텀을 두고 대답이 돌아왔다. 한석율 씨?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동요가 석율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리 없다. 뭐야… 아예 신경을 안 쓰는 건 아니네. 씩 웃은 석율이 예의바름을 가장한 목소리로 물 흐르듯 본격적인 통화를 시작했다.

 

 

몸이 붕- 하고 뜨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좋은 꿈이다. 배시시 웃으며, 저를 안아 올린 사람의 목에 팔을 두른 백기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향기. 우으으… 응… 더 맡고 싶어, 강아지처럼 낑낑대며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는다. 이윽고 붕 떴던 몸이 가라앉았다. 멀어지려는 익숙한 내음이 안타까워 목을 꼭 끌어안은 백기가, 제 얼굴에 닿는 숨결에 반짝 눈을 떴다. 꿈…이, 아닌가? 그리고 이어지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깼으면, 좀 놓죠.”

“으아!!!”

“…….”

화들짝 놀란 수준이 아니라, 공포영화에서 귀신이 나오는 장면을 본 것처럼 자지러지며 팔을 풀고 뒤로 물러난 백기의 눈에 보인 사람은 해준이었다. 브이넥 니트에 코트를 걸친, 제 사수. 강해준. 이거, 꿈이겠지? 근데 강 대리님은 꿈에서도 왜 이렇게 멋있을까. 사복 입은 거, 처음 보는데… 멋있다. 하얗게 질렸다가 발갛게 물들었다가 시시각각 변하는 백기의 얼굴을 보던 해준이 헛웃음을 터뜨린 순간, 백기는 이건 꿈이라고 단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해준이 저렇게 웃을 리가 없으니. 거기다 저를 안아서 옮겨줬을 리도 당연히!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백기가 시무룩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술 잘 하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마십니까.”

“…누구 때문인데…”

“네?”

“누구 때문인데요, 이게. 다, 다… 대리님 때문 아닙니까아…”

여기 앉아 보십셔! 제 옆을 팡팡 치며 나름 앙칼진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백기의 모습에 해준이 무슨 생각인지, 순순히 침대 위에 걸터앉는다. 백기는 그의 너른 어깨에 콩-하고 고개를 박고 잠시 갈등했다. 꿈이니까 괜찮겠지. 꿈인데 뭐. 그러자마자 봇물 터지듯, 백기의 입술 사이로 온갖 감정이 흘러나왔다.

저느은, 대리님만 보면… 막… 떨리고, 죽을 것 같은데… 더 가까워지고 싶은데… 저 봐주지도 않으시지 않습니까아. 다른 대리님들이랑 얘기하실 때는, 웃기도 하시면서, 왜… 왜 저한테만 안 웃어주시는 겁니까. 대리님 진짜… 정말… 너무해요. 감정이 치받힌 모양인지 종반엔 울음이 섞인다 싶더니 기어코 어깨를 가늘게 떨며 울음을 터뜨린 백기의 두 뺨을, 해준이 손으로 감쌌다. 싫어… 놔요, 이거… 이젠 제법 짧아지기까지 한 말투에, 해준의 손을 떼어내려는 듯 도리질까지. 그런 백기의 얼굴을 제 쪽으로 보게 한 해준이 눈을 맞췄다.

“싫습니까.”

“흐으… 뭐가…”

“싫다면서요. 방금 장백기 씨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정한 눈. 더 올라오려는 눈물을 참지 못한 백기가 고개를 저었다.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아주는 해준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치며, 백기는 참고 눌렀던 한 마디를 겨우 꺼내 놓았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좋아…합니다. 강해준 대리님. 안 싫어요… 좋아서, 미칠 것 같아…”

그러니까, 저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닿았다.

 

**

 

씻고 나왔는데, 백기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한 쪽 눈썹을 올린 해준이 눈으로 사방을 훑었다. 부끄러워서 숨은 건 아닐 테고. 시선의 끝은 침대 위, 동그랗게 뭉쳐진 시트였다. 설마. 성큼성큼 걸어간 해준이 슬쩍 시트를 들췄다. 예상 적중. 새근새근 잠든 백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아지가 따로 없다, 아주.

“…얼마나 더 귀여워질 겁니까, 당신.”

입가에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그 미소를 애써 감출 필요성을, 이제는 느끼지 못한다. 해준이 한숨을 섞어 다시 웃음을 흘렸다. 좀 더 자게 내버려 둘까. 초심자를 상대로 무리시킨 건 자신이었으니. 꼬물꼬물, 동그랗게 말린 몸이 온기를 찾아 제 쪽으로 향한다. 해준은 백기에게 제 허벅지를 내어주고 눈을 감았다. 주말은 기니까. 오늘 정도는 게으름부려도 괜찮겠지.

 

 

+

 

성적인 접촉을 낯설어하는 백기의 몸은 해준의 손길에 가감 없이 반응했다. 어디를 만져도 녹아내리는 백기 덕분에 휩쓸리고 있는 쪽은 해준이었다. 학, 흐으, 대리, 님. 흐응, 뜨거…워, 요… 너무 울어서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에 입술을 대며 해준이 간신히 이성을 붙들었다. 평소보다 한참은 높은 톤의 목소리로 자꾸 애타게 저를 부르는 백기는 상상 이상으로 위험해서, 능숙한 해준마저 조급하게 만들었다.

천천히, 그러나 깊게 몸을 파고드는 감각에 백기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등허리를 쓸고 허리를 매만지는 뜨거운 손과 백기의 입술을 몇 번이고 찾는 해준의 입술이 아니었다면 참아내지 못했을지도 모를 고통이었다. 혹여나 해준이 그만둘까 아프다는 소리는 꾹 참는 백기를 아는지, 해준은 백기의 몸이 풀릴 때까지 끌어안고 달래주었다. 백기는 간신히 눈을 뜨고 해준을 올려다 보다 차오르는 뿌듯함에 저도 모르게 웃었다. 더듬더듬, 해준의 등을 안고 있던 팔을 움직여 목에 두르고는 어설프게 입술을 겹친다. 아이 같은 키스에 해준이 낮게 웃으며 백기의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입술이 닿은 채로 백기를 부른다. 백기 씨. …이름, 불러 봐요. 그 말에 백기가 조심스럽게 강해준, 대리님…? 하자, 대리님 떼고.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해준.

해… 해준, 씨.

…잘했습니다. 그럼 상을 줘야겠죠.

네…? 아? 흡!

밤은 길었다.

by R_i_a_n 2014. 12. 28. 10:04
| 1 2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