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이킬 수 없는 02


“흐으… 으…!”


살얼음판 위를, 한 번도 신어보지 않은 스케이트를 신고 걷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걸까. 마음껏 지치고 나가기에는 얼음이 단단하지 않을뿐더러 스케이트도 익숙하지 않다. 금방이라도 깨져서 물속으로 잠겨 버릴 것만 같은, 그런 감각. 서로의 맨살을 맞대고 키스를 주고받으며 뇌가 녹아버리는 착각이 일 정도의 쾌락을 느끼면서도 어느 순간 다가온 그 느낌이 목을 조른다. 꿈에서도 예외는 없다. 석율과 몸을 섞은 날 밤이면 더더욱 그랬다. 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깬 백기가 거친 숨을 애써 삼켰다. 주위는 어둡다. 해가 뜨기까지는 아직 멀었다.


“…왜 또 깼어.”


흠칫. 가라앉은 석율의 목소리가 백기의 귓가에 감겨든 순간 몸이 반응했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백기가, 제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는 석율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종종 이렇게 새벽마다 깨는 덕에 석율은 백기와 함께 자는 날이면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가끔 깨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석율이 안고 한참을 괜찮다 속삭여야 다시 잠들고는 했다. 딱 한 번, 잠들었다가 깨지 말라고 좀 심하게 다룬 적이 있었다. 물론 결과는 성공이었으나, 다음 날 해준에게 호되게 혼이 나는 걸 보고 그 방법은 포기한 석율이었다.


“미안. 나 때문에 깬 겁니까…?”
“괜찮아요. …고개 좀 들어보지, 백기 씨.”


굿나잇 키스 해줄 테니까, 빨리 자. 머뭇거리다 고개를 든 백기의 이마, 눈, 코, 입술에 차례대로 입술을 찍은 석율이 졸린 눈으로 웃음을 지었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석율의 미소와 닿아 오는 따뜻한 체온에 백기가 다시 눈을 감았다. 울컥 하고 눈물이 나오려 하는 걸 간신히 참았다. 비겁한 새끼. 저 자신에게 욕을 하며, 석율의 품에 파고든다. 규칙적인 심장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백기가 천천히 잠이 들었다.


…잠든 모양이네.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에 석율이 그제야 몸에 힘을 뺀다. 출근하려면 자신도 얼른 자야 하는데, 입가에 살짝 배인 미소가 점점 진해진다. 백기 안에서 어떤 갈등이 있는지 안 봐도 훤했다. 관계를 지속하면서도 석율의 감정에 답을 하지 못하는 죄책감과, 석율과 몸을 맞대면 맞댈수록 더 커져가는 해준에 대한 감정이 소용돌이를 치고 있으리라.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하면서도 저를 거부할 줄 모르고, 제 아래에서 예쁘게 우는 백기가 귀엽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휩쓸리는 백기는 순간순간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겠지만, 석율은 달랐다. 이 시간이 하루라도 더 길어야 했다. 그래야 백기가 온전히 자신의 품에 추락할 수 있으니.


결벽증이 있는 강해준이, 과연 다른 남자를 알아 버린 장백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른 석율이, 곤히 잠든 백기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아닐 거다. 혹여나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불쑥불쑥 내가 길들여 놓은 장백기의 모습이 보이겠지. 처음부터 다시 물들이려 해도 생각처럼 잘 안 될 거고. ‘처음’ 이,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강해준 대리님. 가져갈 수 있으면, 빼앗아갈 수 있으면 어디 해 보시죠. 백기의 어깨에 이를 세우며 석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요즘 백기 씨 분위기 변한 것 같지 않아?
- 너도 느꼈어?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연애하나?


그걸 모르면 이상한 거다. 바로 곁에서 일하고 있는 해준이 보기에도 그 변화가 너무 확실해서, 탕비실에서 여직원들의 대화를 듣고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연애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석율이 오며가며 사무실에 들러 말을 걸 때마다 자꾸 제 눈치를 보는 걸 보면. 무엇보다, 지금 백기의 상태는 연애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장백기 씨.”
“…….”


세 시 안으로 달라고 했던 보고서를, 기억은 하고 있는 걸까.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지만 정작 그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해준이 다시 백기를 불렀다. 장백기 씨. 안 들립니까.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백기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해준의 앞에 섰다. ……아무리 봐도 연애하는 사람의 얼굴은 아니다.


“……따라와요.”


사무실 안에서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일부러 옥상을 택했다. 벌 받는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제 앞에 선 백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해준이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소리에 백기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장백기 씨. 회사에 일 하러 온 거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회사에 사적인 일 끌어들이지 마세요. 그렇게 티내고 다니는데 모를 것 같습니까. 굉장히, 거슬립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말이 날카롭다. 새파랗게 날이 선 말들이 백기를 할퀴고 있다는 걸 알지만, 이미 해 버린 말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조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면 지금, 위로라도 받고 싶은 겁니까?”
“…….”
“이렇게 흐트러질 정도로 힘드니까 좀 알아 달라고 투정 부리는 거냐는 말입니다.”
“아닙, 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이럴 거면 차라리 나가는 게 어떻습니까.”


더 이상 실망하게 만들지 말고. 백기가 부정을 하든 말든 할 말을 끝낸 해준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쿵, 하고 옥상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힌다. ……젠장. 기어코 해준의 입술 사이로 욕이 새었다. 말이 심했다.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이 되어 버린 탓에, 혀끝에 독이라도 묻은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문득 태우지도 않던 담배가 절실해질 정도로, 백기가 마음에 걸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유도 모른 채 해준은 마음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갔다.



- 이럴 거면 차라리 나가는 게 어떻습니까.


옥상 문이 닫히자마자 백기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해준의 말을 들으면서 내내 참았던 눈물이 왈칵, 소리 없이 터져 나오는 것이리라. 옥상 구석에서 불도 붙이지 못한 담배를 이로 물어뜯다시피 하던 석율이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웅크려 앉아 애처롭게 울고 있는 백기의 머리 위로, 정장 마이를 덮어준다. 석율은 놀라서 고개를 들려 하는 백기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그를 품에 안았다. 쉬이. 괜찮아. 나야 나. 착하지. …괜찮아. 귓가에 익숙한 석율의 목소리가 들리자, 백기의 몸이 잠시 굳었다. 윽, 끄으… 흑, 흐으… 으, 기어코 터지는 서러운 흐느낌에 석율이 입술을 깨물었다. 등을 토닥이는 손이 떨린다.


곁에 있어도, 다른 사람이 준 상처로 만신창이가 되어 피를 철철 흘린다. 내가 주고 있는 상처만으로도 충분히 힘들 텐데. 그렇다고 내가 너를 놓아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널, 어쩌면 좋을까. 내 아래에서만, 내 팔 안에서만 울었으면 좋겠는데. 석율의 눈이 아득히, 저 깊은 곳처럼 까매진다.


아니다. 강해준은 세상에서 제일 쉽게, 그리고 잔인하게 널 아프게 하는 유일한 사람에 그쳐야 한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네가 유일하게 기댈 단 한 사람이어야 해서. 그러니까 울어라. 눈물이 다 마를 때까지라도 상관없어. 강해준 때문에 우는 만큼 나에게 미안해하고, 나에게 흔들려.


다 울었을까. 잠잠해진 백기를 보고 마이를 슬쩍 들췄다. 눈물로 엉망인 얼굴이 보여 석율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그 사람 앞에서 보이지 못하는 눈물을 내 앞에서 보여주니까. 이미 너는 나를 경계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석율이 제 마이를 백기의 어깨에 걸쳐주며 백기를 불렀다.


“백기씨.”
“…….”
“……고개 좀 들어 봐요. 닦아줄게.”
“제가, 하겠습니다.”
“씁. 오빠 화낸다.”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을 하지만 석율의 눈이 위험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백기는 잠자코 고개를 들었다. 안경을 벗겨낸 석율이, 손수건을 꺼내 백기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냈다. 우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 하며 깨물어서 피가 배어난 입술, 처연하게 젖은 속눈썹까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백기를 한참 들여다보다 석율은 아오, 씨… 하고 기어코 욕을 뱉으며 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장백기.”
“네.”
“나, 고맙지?”
“푸… 네.”
“그럼 키스해도 돼?”
“…네?”
“아니, 키스할게.”
“잠깐, 만… 여기 회사, 읍…”


주저 없이 백기의 턱을 쥐고 끌어당긴 석율이 입술을 삼킨다. 버둥버둥, 제 가슴팍이며 어깨를 쳐 대는 백기의 손목을 홱 잡아채 뒤로 꺾고는 혀로 진득하게 입천장과 이 안쪽을 문지르자 백기의 몸에서 금세 힘이 빠졌다.



**



오랜만에 혼자 자취방에서 잠든 날이었다. 펄펄 끓는 열에 잠이 깼다. 깨어있는지, 잠든 건지도 분간하기 힘들 만큼 불덩이 같은 몸을 이끌고 겨우 일어나, 구석에 처박아뒀던 구급상자를 열었다. 해열제가, 있을 텐데. 안경을 끼지 않아 흐린 눈을 가늘게 뜨고, 백기가 더듬거리는 손으로 약을 쥐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자취방이라 냉장고까지 몇 걸음 되지도 않는데, 그 거리가 까마득하다. 물에 흠뻑 젖은 솜처럼 무거운 발을 이끌고, 냉장고를 열어 꺼내 든 물병의 무게감마저 평소와 달랐다. …왜 하필이면 오늘이야. 오늘만 버티면 주말인데. 왈칵 올라온 짜증에 무심코 고개를 젖힌 백기는 온 세계가 도는 느낌과 함께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금요일 아침, 눈에 들어온 시계는 아침 여섯 시 이십사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아침밥을 밀어 넣다, 얼마 못 가 도로 다 게워냈을 땐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셔츠 안에 히트텍, 셔츠 위에 니트 베스트에,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제일 두꺼운 코트까지 걸치고 캐시미어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 집을 나섰는데도 욕이 나올 정도로 추웠고. 해열제를 먹어서 어느 정도 열은 내려갔다지만 여전히 눈앞은 흐릿한데다 다른 사람들과 스치기만 해도 온몸이 징 하고 울렸다. 평소처럼 출근하려고 버스를 타고 나서야 택시라는 수단이 떠오른 탓에 그야말로 지옥 같은 출근길이었다. 학교 다닐 때였으면 아무 고민 없이 자체휴강하고 집에서 죽은 듯이 잠만 잤을 텐데.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 어떻게든 사무실에 도착한 백기가 느릿느릿 늘어지는 손길로 목도리를 풀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잘게 몸을 떨었다.


출근도 칼 같이. 특별한 일이 있을 때가 아니고서는 항상 아홉시 되기 15분 전에서 10분 전에 출근하는 해준이라 옆자리는 아직 비어 있다.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강, 해, 준, 하고 해준의 이름을 불렀다.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흐트러짐 없이 항상 완벽하고 섹시하기까지 한 사람이 이름도 해준이라니…. 신은 공평하다고들 하는데, 해준을 만든 걸 보면 가끔 안 그럴 때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넋을 놓다시피 한 백기를 현실로 돌아오게 한 건 다인이었다. 백기씨 일찍 오셨네요? 맑은 목소리에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아 네. 대답하는 백기의 볼이 붉어, 다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화할 수 있는 스트레스의 한계치를 넘은 몸은, 고작 약 몇 알로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앉아서 전화를 받고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두드리는 게 지금의 백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시야가 일그러지며 도는 탓에, 오늘은 해준의 옆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도 완벽한 사수는, 부사수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듯 혼자 바쁘게 일하고 있다. 평소였다면 또 자괴감에 빠졌겠지만 백기는 지금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집에, 가고 싶다. 아직 점심시간 되려면 20분이나 남았는데… 어떻게 견디지… 이미 몇 번이나 깨물어서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다시 깨물며, 백기가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만 더 견디면 점심시간이니까, 그 때 눈 좀 붙이면 될 거야.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타이밍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오전 내내 제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던 해준이 입을 뗐다.


“장백기 씨.”
“……네.”
“재무회계실 다녀오세요. 가면, 서류 주실 겁니다. 그거 받아오면 됩니다.”
“알겠, 습니다.”


해준이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오는 ‘모니터 보면서 말하기’ 스킬 덕분에 자신의 몸 상태를 들키진 않은 것 같다. 백기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이 일만 끝내 놓고. 조금만 더 버텨줘. 정신 차리자, 장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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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킬 수 없는 / 석율->백기->해준


“…백기 씨?”
“후으… 왜요오…”

취했다. 취했어. 그것도 완-전. 석율이 피식 웃으며 한 번 더 백기의 이름을 불렀다. 백기 씨. 왜 부릅니까아, 하는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안경 너머의 풀린 눈이 저를 향함에, 등줄기를 타고 허리께까지 짜릿한 감각이 내달렸다. 몽롱하다 못해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백기의 눈은 좀 위험했다. 넙죽넙죽 주는 대로 잘 받아 마신다 싶더니, 결국 오늘도 먼저 테이블 위로 엎어진 백기를 석율이 눈으로 훑었다. 저번엔 집까지 데려다 주는 센스를 발휘했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그럴 예정이 없었다.


꽤 무거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볍다. 그렇다고 안 무거운 건 아니지만. 완전히 늘어져 버린 백기를 업고 들어와 침대에 조심조심 눕힌 석율은 거칠어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꽤 빨라진 심장박동이 쿵쿵 귓가를 때린다. 잠버릇이 없는 건지 백기는 눕혀준 그 자세 그대로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다. 이봐요, 장백기 씨. 누가 이렇게 예쁘게 자래요. 경계도 안 하고. 외간 남자 집, 그것도 침대 위에서. 응? 하고 싶은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속에서 맴돈다. 피식 웃어 버린 석율이 이내 백기의 안경을 벗겨냈다.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도 요령 좋게 한 손으로 풀어내 안경 옆에 두고 목 끝까지 채워진 단추를 끄르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다.

또 하나 의외. 피부가 그다지 까맣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는데… 장그래보단 덜하지만 어쨌든 남자치고는 하얗다. 석율은 셔츠 사이로 드러난 백기의 가슴을 지나 허리에 머무르던 시선을 거두고 제 마이를 벗어 의자에 던졌다. 자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취미는 없으니, 일단 깨워야겠지. 누가 업어가도 안 깰 것 같이 잠든 백기의 뺨을 잠시 손바닥으로 쓸다, 석율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 여전히 미동 없음. 이걸로는 안 깬다 이건가. 촉,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석율의 입술이 이번에는 백기의 입술을 아예 삼켰다. 숨마저 앗아버릴 기세로 입술을 부딪치고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어 입 안을 범한 그 순간,

“으응…!”

백기가 눈을 떴다. 침대에 옆으로 걸터앉아선 불편하게 상체만 틀어 키스하던 석율은 순식간에 백기의 위로 올라 탄 자세를 취하고 백기의 양 팔목을 단단히 쥐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반항 불가 상태가 되어 버린 백기가 다리를 움직여 보지만, 술에 절어서 얼마 전까진 움직이지도 못한 몸이다. 훗 코웃음을 친 석율이 능숙하게 제 다리를 백기의 다리와 얽었다. 집요하게 입술을 물고 늘어지던 석율의 입술이 떨어진 순간 참았던 소리를 지르려던 백기는, 저를 내려다보는 석율의 시선에 얼어붙었다. 온통 젖은 입술만 파르르 떨며 석율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맹수 같은 눈빛을 한 이 남자가 한석율이라고? 백기가 아는 한석율은 매일 실없이 웃음이나 뿌리고 다니고, 다이내믹하게 감정을 표현하며 천진한 언어 구사를 하던 남자다. 시퍼렇게 날이 서서 누군가를 잡아먹으려 드는 짐승이 아니라. 짐승이, 아니, 석율이 표정 변화 없이 입만 열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할까.”
“…….”
“무서워요?”

너 같으면 안 무섭겠습니까. 나도 나름 남잔데. 지금 상태로 봐선 아무리 반항을 하고 싫다고 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걸 안다. 얼마나 꽉 쥐고 있는지, 피가 안 통해서 이젠 저릿저릿해져오는 손 때문에 백기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좀 놔 봐요. 아픕니다.”
“싫은데.”
“한석율 씨.”
“때리고 도망갈 거 아닙니까.”
“안 때릴 테니까, 좀… 놓으라구요.”

순순히 놓아준 석율 덕분에 백기는 자유로워진 손을 쥐락펴락하며 생각에 잠겼다. 기억이 어디에서 끊겼는지 거꾸로 되짚는 백기를 석율은 그저 내려다볼 뿐. 울리는 머리에 끄응,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난다. 일단 오늘은 목요일이고, 해준이 시킨 일을 마저 끝내느라 조금 늦게까지 사무실에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석율도 어디서 짠 하고 나타나서는…

- 잔업해요? 퇴근 안 해?
- 방금 끝났습니다.
- 술 한 잔 해요.
- …금요일 아닌데요.
- 술은 뭐, 금요일에만 먹어야 된다는 법 있어요? 거 참 이상한 법이네.

그러면서 참 예쁘게도 웃던 석율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따라 웃으며, 백기는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같다. 해준의 책상 위로 숙제가 담긴 USB를 놓아두고 코트를 입은 백기가 가방을 들었다. 못내 맘에 걸리는 듯, 자꾸 시선이 해준의 책상으로 향한다. 가방이 있는 걸 보면 아직 퇴근은 안 한 것 같은데… 어디 가신 거지. 그런 백기를 재촉하듯 석율이 백기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어, 하는 사이에 엘리베이터에 태워져서 실없는 농담을 들었던 것 같다. 장백기 씨 손목 되게 가늘다. 손가락도 예뻐. 라는. 그리고 저번에 갔던 술집, 같은 테라스 자리에서.

- 장백기 씨.
- 말해요.
- 강 대리 좋아하죠?
- 컥! 큽!

넘어가던 술이 도로 올라왔다.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고 황당한 눈길로 석율을 보는데, 석율은 웃고 있지 않았다. 순간, 조급해졌다. 그렇게 티가 났나 싶었다. 당사자인 백기도 자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타인인 석율이 알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이렇게 확신을 갖고.

- 대답 안 해도 알겠네.
- 한석율 씨.
- 걱정 마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그냥 물어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힘들겠다 싶어서.
- ……뭐가 말입니까.
- 여러 가지로.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반쯤 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들키지 말아야 할 비밀을 누군가가 알아버린 이 상황에서, 그 누군가가 석율이라는 사실에 백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불안해야 하는데. 아니라고 부정 한 번 못하고 인정해 버린 건데. 그래서 마음을 놓았던 게, 화근이었다.

“…기억났나 보네.”
“한석율 씨, 저는…”
“대답은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대답 원하고 데려온 건 아니거든.”

석율은 백기를 내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이 상황과 참 안 어울리는 미소인데다 소름끼칠 만큼 차갑다. 귓가에 맴도는 석율의 고백이 저를 괴롭히기도 했다. ‘장백기 씨. 그냥 나한테 와요. 위로라고 생각하고.’ 백기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석율과 눈을 맞췄다.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저를 보는, 낯선 눈이 어딘가 모르게 슬프다.

“…후회, 할 겁니다.”
“어이구, 내 걱정도 해 주는 건가?”
“한…”
“필요 없다고 한 것 같은데. 응. 후회든 삽질이든 내가 하니까, 백기 씨는 신경 꺼요. 눈 감고, 날 강해준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

다시 입술이 닿았다.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는 듯 석율의 입술이 말도 숨도 망설임도 모두, 앗아간다. 허공을 맴돌던 시선은 이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가려졌다.




석율은 까무러치듯 잠에 빠진 백기의 부은 눈을 가만히 매만졌다. 아직도 젖어 있는 눈가는 발갛게 달아올라 열을 품은 채다.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던 백기의 안처럼. 불쑥 치고 올라오는 열기를 해소하기 위해, 담배를 물었다. 아… 하고 나서 바로 담배 무는 건 나쁜 남자라고 하던데.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석율이 한 쪽 입술을 비스듬히 올린다. 어차피, 해준을 맘에 담은 백기를 눈에 들인 순간부터…

“후우…”

포기했다. 그런 건.


**


무슨 정신으로 출근을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벌써 열 번은 떨어뜨린 것 같은 펜을 다시 주워 들다, 백기가 윽 하고 입술을 물었다. 온 몸이, 아주 난리다. 삐걱삐걱, 로보트도 아니고 이건 뭐.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욱신하고 움직일 때마다 징징 울리고. 최대한 주위에 들리지 않게 깊게 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손목에 옅게 든 멍이 보일까, 괜히 셔츠 소매를 좀 끌어내리는 백기를 해준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저번에 갔던 데 갈까요?
- ...네.

어젯밤, 장백기는 한석율과 같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어제 입었던 정장에, 맸던 넥타이 그대로 출근했다. 해준의 시선이 백기의 얼굴에서 셔츠 카라 위의 목덜미로 향했다.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위치에, 흔적이 보인다. 잘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지만, 공교롭게도 해준은 백기의 바로 옆자리였다.

"장백기 씨."
"네?"
"....어디 아픕니까."
"아, 닙.. 니다. 대리님."

해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대답하는 백기.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선이 백기가 지금 얼마나 불안한지 보여주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해준이 뭐라고 하려고 입을 연 순간,

"백기 씨, 잠시만."
"네?"

석율이 들어왔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강 대리님, 잠시 백기씨 좀 빌려가겠습니다. 하며 백기의 손목을 쥔 석율이 해준과 눈을 맞춘다. 당황한 백기가 석율의 손을 떼어내려 끙끙대지만, 어림도 없었다. 해준이 답을 하건말건, 석율은 막무가내였다. 가 보세요. 급한 것 같은데. 해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석율이 백기를 잡아 끌고 사라졌다.

기분이, 좋지 않다. 까닭 모를 거북함에 해준이 습관처럼 두통약을 꺼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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