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이킬 수 없는 / 석율->백기->해준


“…백기 씨?”
“후으… 왜요오…”

취했다. 취했어. 그것도 완-전. 석율이 피식 웃으며 한 번 더 백기의 이름을 불렀다. 백기 씨. 왜 부릅니까아, 하는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안경 너머의 풀린 눈이 저를 향함에, 등줄기를 타고 허리께까지 짜릿한 감각이 내달렸다. 몽롱하다 못해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백기의 눈은 좀 위험했다. 넙죽넙죽 주는 대로 잘 받아 마신다 싶더니, 결국 오늘도 먼저 테이블 위로 엎어진 백기를 석율이 눈으로 훑었다. 저번엔 집까지 데려다 주는 센스를 발휘했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그럴 예정이 없었다.


꽤 무거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볍다. 그렇다고 안 무거운 건 아니지만. 완전히 늘어져 버린 백기를 업고 들어와 침대에 조심조심 눕힌 석율은 거칠어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꽤 빨라진 심장박동이 쿵쿵 귓가를 때린다. 잠버릇이 없는 건지 백기는 눕혀준 그 자세 그대로 새근새근 잘도 자고 있다. 이봐요, 장백기 씨. 누가 이렇게 예쁘게 자래요. 경계도 안 하고. 외간 남자 집, 그것도 침대 위에서. 응? 하고 싶은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속에서 맴돈다. 피식 웃어 버린 석율이 이내 백기의 안경을 벗겨냈다.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도 요령 좋게 한 손으로 풀어내 안경 옆에 두고 목 끝까지 채워진 단추를 끄르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다.

또 하나 의외. 피부가 그다지 까맣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는데… 장그래보단 덜하지만 어쨌든 남자치고는 하얗다. 석율은 셔츠 사이로 드러난 백기의 가슴을 지나 허리에 머무르던 시선을 거두고 제 마이를 벗어 의자에 던졌다. 자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취미는 없으니, 일단 깨워야겠지. 누가 업어가도 안 깰 것 같이 잠든 백기의 뺨을 잠시 손바닥으로 쓸다, 석율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았다. 여전히 미동 없음. 이걸로는 안 깬다 이건가. 촉,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석율의 입술이 이번에는 백기의 입술을 아예 삼켰다. 숨마저 앗아버릴 기세로 입술을 부딪치고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어 입 안을 범한 그 순간,

“으응…!”

백기가 눈을 떴다. 침대에 옆으로 걸터앉아선 불편하게 상체만 틀어 키스하던 석율은 순식간에 백기의 위로 올라 탄 자세를 취하고 백기의 양 팔목을 단단히 쥐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반항 불가 상태가 되어 버린 백기가 다리를 움직여 보지만, 술에 절어서 얼마 전까진 움직이지도 못한 몸이다. 훗 코웃음을 친 석율이 능숙하게 제 다리를 백기의 다리와 얽었다. 집요하게 입술을 물고 늘어지던 석율의 입술이 떨어진 순간 참았던 소리를 지르려던 백기는, 저를 내려다보는 석율의 시선에 얼어붙었다. 온통 젖은 입술만 파르르 떨며 석율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맹수 같은 눈빛을 한 이 남자가 한석율이라고? 백기가 아는 한석율은 매일 실없이 웃음이나 뿌리고 다니고, 다이내믹하게 감정을 표현하며 천진한 언어 구사를 하던 남자다. 시퍼렇게 날이 서서 누군가를 잡아먹으려 드는 짐승이 아니라. 짐승이, 아니, 석율이 표정 변화 없이 입만 열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할까.”
“…….”
“무서워요?”

너 같으면 안 무섭겠습니까. 나도 나름 남잔데. 지금 상태로 봐선 아무리 반항을 하고 싫다고 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걸 안다. 얼마나 꽉 쥐고 있는지, 피가 안 통해서 이젠 저릿저릿해져오는 손 때문에 백기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좀 놔 봐요. 아픕니다.”
“싫은데.”
“한석율 씨.”
“때리고 도망갈 거 아닙니까.”
“안 때릴 테니까, 좀… 놓으라구요.”

순순히 놓아준 석율 덕분에 백기는 자유로워진 손을 쥐락펴락하며 생각에 잠겼다. 기억이 어디에서 끊겼는지 거꾸로 되짚는 백기를 석율은 그저 내려다볼 뿐. 울리는 머리에 끄응,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난다. 일단 오늘은 목요일이고, 해준이 시킨 일을 마저 끝내느라 조금 늦게까지 사무실에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석율도 어디서 짠 하고 나타나서는…

- 잔업해요? 퇴근 안 해?
- 방금 끝났습니다.
- 술 한 잔 해요.
- …금요일 아닌데요.
- 술은 뭐, 금요일에만 먹어야 된다는 법 있어요? 거 참 이상한 법이네.

그러면서 참 예쁘게도 웃던 석율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따라 웃으며, 백기는 고개를 끄덕였던 것도 같다. 해준의 책상 위로 숙제가 담긴 USB를 놓아두고 코트를 입은 백기가 가방을 들었다. 못내 맘에 걸리는 듯, 자꾸 시선이 해준의 책상으로 향한다. 가방이 있는 걸 보면 아직 퇴근은 안 한 것 같은데… 어디 가신 거지. 그런 백기를 재촉하듯 석율이 백기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어, 하는 사이에 엘리베이터에 태워져서 실없는 농담을 들었던 것 같다. 장백기 씨 손목 되게 가늘다. 손가락도 예뻐. 라는. 그리고 저번에 갔던 술집, 같은 테라스 자리에서.

- 장백기 씨.
- 말해요.
- 강 대리 좋아하죠?
- 컥! 큽!

넘어가던 술이 도로 올라왔다.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고 황당한 눈길로 석율을 보는데, 석율은 웃고 있지 않았다. 순간, 조급해졌다. 그렇게 티가 났나 싶었다. 당사자인 백기도 자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타인인 석율이 알고 있는 것인가. 그것도 이렇게 확신을 갖고.

- 대답 안 해도 알겠네.
- 한석율 씨.
- 걱정 마요,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그냥 물어보고 싶었던 것뿐이야. 힘들겠다 싶어서.
- ……뭐가 말입니까.
- 여러 가지로.

가슴 속에 응어리졌던 무언가가 반쯤 녹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들키지 말아야 할 비밀을 누군가가 알아버린 이 상황에서, 그 누군가가 석율이라는 사실에 백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불안해야 하는데. 아니라고 부정 한 번 못하고 인정해 버린 건데. 그래서 마음을 놓았던 게, 화근이었다.

“…기억났나 보네.”
“한석율 씨, 저는…”
“대답은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대답 원하고 데려온 건 아니거든.”

석율은 백기를 내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이 상황과 참 안 어울리는 미소인데다 소름끼칠 만큼 차갑다. 귓가에 맴도는 석율의 고백이 저를 괴롭히기도 했다. ‘장백기 씨. 그냥 나한테 와요. 위로라고 생각하고.’ 백기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석율과 눈을 맞췄다.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저를 보는, 낯선 눈이 어딘가 모르게 슬프다.

“…후회, 할 겁니다.”
“어이구, 내 걱정도 해 주는 건가?”
“한…”
“필요 없다고 한 것 같은데. 응. 후회든 삽질이든 내가 하니까, 백기 씨는 신경 꺼요. 눈 감고, 날 강해준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

다시 입술이 닿았다.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는 듯 석율의 입술이 말도 숨도 망설임도 모두, 앗아간다. 허공을 맴돌던 시선은 이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가려졌다.




석율은 까무러치듯 잠에 빠진 백기의 부은 눈을 가만히 매만졌다. 아직도 젖어 있는 눈가는 발갛게 달아올라 열을 품은 채다.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던 백기의 안처럼. 불쑥 치고 올라오는 열기를 해소하기 위해, 담배를 물었다. 아… 하고 나서 바로 담배 무는 건 나쁜 남자라고 하던데.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석율이 한 쪽 입술을 비스듬히 올린다. 어차피, 해준을 맘에 담은 백기를 눈에 들인 순간부터…

“후우…”

포기했다. 그런 건.


**


무슨 정신으로 출근을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벌써 열 번은 떨어뜨린 것 같은 펜을 다시 주워 들다, 백기가 윽 하고 입술을 물었다. 온 몸이, 아주 난리다. 삐걱삐걱, 로보트도 아니고 이건 뭐.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욱신하고 움직일 때마다 징징 울리고. 최대한 주위에 들리지 않게 깊게 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손목에 옅게 든 멍이 보일까, 괜히 셔츠 소매를 좀 끌어내리는 백기를 해준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저번에 갔던 데 갈까요?
- ...네.

어젯밤, 장백기는 한석율과 같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어제 입었던 정장에, 맸던 넥타이 그대로 출근했다. 해준의 시선이 백기의 얼굴에서 셔츠 카라 위의 목덜미로 향했다.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위치에, 흔적이 보인다. 잘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지만, 공교롭게도 해준은 백기의 바로 옆자리였다.

"장백기 씨."
"네?"
"....어디 아픕니까."
"아, 닙.. 니다. 대리님."

해준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대답하는 백기.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선이 백기가 지금 얼마나 불안한지 보여주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해준이 뭐라고 하려고 입을 연 순간,

"백기 씨, 잠시만."
"네?"

석율이 들어왔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강 대리님, 잠시 백기씨 좀 빌려가겠습니다. 하며 백기의 손목을 쥔 석율이 해준과 눈을 맞춘다. 당황한 백기가 석율의 손을 떼어내려 끙끙대지만, 어림도 없었다. 해준이 답을 하건말건, 석율은 막무가내였다. 가 보세요. 급한 것 같은데. 해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석율이 백기를 잡아 끌고 사라졌다.

기분이, 좋지 않다. 까닭 모를 거북함에 해준이 습관처럼 두통약을 꺼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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