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이킬 수 없는 02


“흐으… 으…!”


살얼음판 위를, 한 번도 신어보지 않은 스케이트를 신고 걷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걸까. 마음껏 지치고 나가기에는 얼음이 단단하지 않을뿐더러 스케이트도 익숙하지 않다. 금방이라도 깨져서 물속으로 잠겨 버릴 것만 같은, 그런 감각. 서로의 맨살을 맞대고 키스를 주고받으며 뇌가 녹아버리는 착각이 일 정도의 쾌락을 느끼면서도 어느 순간 다가온 그 느낌이 목을 조른다. 꿈에서도 예외는 없다. 석율과 몸을 섞은 날 밤이면 더더욱 그랬다. 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깬 백기가 거친 숨을 애써 삼켰다. 주위는 어둡다. 해가 뜨기까지는 아직 멀었다.


“…왜 또 깼어.”


흠칫. 가라앉은 석율의 목소리가 백기의 귓가에 감겨든 순간 몸이 반응했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백기가, 제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는 석율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종종 이렇게 새벽마다 깨는 덕에 석율은 백기와 함께 자는 날이면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가끔 깨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석율이 안고 한참을 괜찮다 속삭여야 다시 잠들고는 했다. 딱 한 번, 잠들었다가 깨지 말라고 좀 심하게 다룬 적이 있었다. 물론 결과는 성공이었으나, 다음 날 해준에게 호되게 혼이 나는 걸 보고 그 방법은 포기한 석율이었다.


“미안. 나 때문에 깬 겁니까…?”
“괜찮아요. …고개 좀 들어보지, 백기 씨.”


굿나잇 키스 해줄 테니까, 빨리 자. 머뭇거리다 고개를 든 백기의 이마, 눈, 코, 입술에 차례대로 입술을 찍은 석율이 졸린 눈으로 웃음을 지었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석율의 미소와 닿아 오는 따뜻한 체온에 백기가 다시 눈을 감았다. 울컥 하고 눈물이 나오려 하는 걸 간신히 참았다. 비겁한 새끼. 저 자신에게 욕을 하며, 석율의 품에 파고든다. 규칙적인 심장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백기가 천천히 잠이 들었다.


…잠든 모양이네.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에 석율이 그제야 몸에 힘을 뺀다. 출근하려면 자신도 얼른 자야 하는데, 입가에 살짝 배인 미소가 점점 진해진다. 백기 안에서 어떤 갈등이 있는지 안 봐도 훤했다. 관계를 지속하면서도 석율의 감정에 답을 하지 못하는 죄책감과, 석율과 몸을 맞대면 맞댈수록 더 커져가는 해준에 대한 감정이 소용돌이를 치고 있으리라.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하면서도 저를 거부할 줄 모르고, 제 아래에서 예쁘게 우는 백기가 귀엽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휩쓸리는 백기는 순간순간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겠지만, 석율은 달랐다. 이 시간이 하루라도 더 길어야 했다. 그래야 백기가 온전히 자신의 품에 추락할 수 있으니.


결벽증이 있는 강해준이, 과연 다른 남자를 알아 버린 장백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른 석율이, 곤히 잠든 백기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아닐 거다. 혹여나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불쑥불쑥 내가 길들여 놓은 장백기의 모습이 보이겠지. 처음부터 다시 물들이려 해도 생각처럼 잘 안 될 거고. ‘처음’ 이,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강해준 대리님. 가져갈 수 있으면, 빼앗아갈 수 있으면 어디 해 보시죠. 백기의 어깨에 이를 세우며 석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요즘 백기 씨 분위기 변한 것 같지 않아?
- 너도 느꼈어?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연애하나?


그걸 모르면 이상한 거다. 바로 곁에서 일하고 있는 해준이 보기에도 그 변화가 너무 확실해서, 탕비실에서 여직원들의 대화를 듣고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연애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석율이 오며가며 사무실에 들러 말을 걸 때마다 자꾸 제 눈치를 보는 걸 보면. 무엇보다, 지금 백기의 상태는 연애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장백기 씨.”
“…….”


세 시 안으로 달라고 했던 보고서를, 기억은 하고 있는 걸까.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지만 정작 그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해준이 다시 백기를 불렀다. 장백기 씨. 안 들립니까.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백기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해준의 앞에 섰다. ……아무리 봐도 연애하는 사람의 얼굴은 아니다.


“……따라와요.”


사무실 안에서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일부러 옥상을 택했다. 벌 받는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제 앞에 선 백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해준이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소리에 백기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장백기 씨. 회사에 일 하러 온 거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회사에 사적인 일 끌어들이지 마세요. 그렇게 티내고 다니는데 모를 것 같습니까. 굉장히, 거슬립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말이 날카롭다. 새파랗게 날이 선 말들이 백기를 할퀴고 있다는 걸 알지만, 이미 해 버린 말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조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면 지금, 위로라도 받고 싶은 겁니까?”
“…….”
“이렇게 흐트러질 정도로 힘드니까 좀 알아 달라고 투정 부리는 거냐는 말입니다.”
“아닙, 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이럴 거면 차라리 나가는 게 어떻습니까.”


더 이상 실망하게 만들지 말고. 백기가 부정을 하든 말든 할 말을 끝낸 해준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쿵, 하고 옥상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힌다. ……젠장. 기어코 해준의 입술 사이로 욕이 새었다. 말이 심했다.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이 되어 버린 탓에, 혀끝에 독이라도 묻은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문득 태우지도 않던 담배가 절실해질 정도로, 백기가 마음에 걸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유도 모른 채 해준은 마음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갔다.



- 이럴 거면 차라리 나가는 게 어떻습니까.


옥상 문이 닫히자마자 백기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해준의 말을 들으면서 내내 참았던 눈물이 왈칵, 소리 없이 터져 나오는 것이리라. 옥상 구석에서 불도 붙이지 못한 담배를 이로 물어뜯다시피 하던 석율이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웅크려 앉아 애처롭게 울고 있는 백기의 머리 위로, 정장 마이를 덮어준다. 석율은 놀라서 고개를 들려 하는 백기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그를 품에 안았다. 쉬이. 괜찮아. 나야 나. 착하지. …괜찮아. 귓가에 익숙한 석율의 목소리가 들리자, 백기의 몸이 잠시 굳었다. 윽, 끄으… 흑, 흐으… 으, 기어코 터지는 서러운 흐느낌에 석율이 입술을 깨물었다. 등을 토닥이는 손이 떨린다.


곁에 있어도, 다른 사람이 준 상처로 만신창이가 되어 피를 철철 흘린다. 내가 주고 있는 상처만으로도 충분히 힘들 텐데. 그렇다고 내가 너를 놓아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널, 어쩌면 좋을까. 내 아래에서만, 내 팔 안에서만 울었으면 좋겠는데. 석율의 눈이 아득히, 저 깊은 곳처럼 까매진다.


아니다. 강해준은 세상에서 제일 쉽게, 그리고 잔인하게 널 아프게 하는 유일한 사람에 그쳐야 한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네가 유일하게 기댈 단 한 사람이어야 해서. 그러니까 울어라. 눈물이 다 마를 때까지라도 상관없어. 강해준 때문에 우는 만큼 나에게 미안해하고, 나에게 흔들려.


다 울었을까. 잠잠해진 백기를 보고 마이를 슬쩍 들췄다. 눈물로 엉망인 얼굴이 보여 석율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그 사람 앞에서 보이지 못하는 눈물을 내 앞에서 보여주니까. 이미 너는 나를 경계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석율이 제 마이를 백기의 어깨에 걸쳐주며 백기를 불렀다.


“백기씨.”
“…….”
“……고개 좀 들어 봐요. 닦아줄게.”
“제가, 하겠습니다.”
“씁. 오빠 화낸다.”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을 하지만 석율의 눈이 위험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백기는 잠자코 고개를 들었다. 안경을 벗겨낸 석율이, 손수건을 꺼내 백기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냈다. 우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 하며 깨물어서 피가 배어난 입술, 처연하게 젖은 속눈썹까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백기를 한참 들여다보다 석율은 아오, 씨… 하고 기어코 욕을 뱉으며 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장백기.”
“네.”
“나, 고맙지?”
“푸… 네.”
“그럼 키스해도 돼?”
“…네?”
“아니, 키스할게.”
“잠깐, 만… 여기 회사, 읍…”


주저 없이 백기의 턱을 쥐고 끌어당긴 석율이 입술을 삼킨다. 버둥버둥, 제 가슴팍이며 어깨를 쳐 대는 백기의 손목을 홱 잡아채 뒤로 꺾고는 혀로 진득하게 입천장과 이 안쪽을 문지르자 백기의 몸에서 금세 힘이 빠졌다.



**



오랜만에 혼자 자취방에서 잠든 날이었다. 펄펄 끓는 열에 잠이 깼다. 깨어있는지, 잠든 건지도 분간하기 힘들 만큼 불덩이 같은 몸을 이끌고 겨우 일어나, 구석에 처박아뒀던 구급상자를 열었다. 해열제가, 있을 텐데. 안경을 끼지 않아 흐린 눈을 가늘게 뜨고, 백기가 더듬거리는 손으로 약을 쥐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자취방이라 냉장고까지 몇 걸음 되지도 않는데, 그 거리가 까마득하다. 물에 흠뻑 젖은 솜처럼 무거운 발을 이끌고, 냉장고를 열어 꺼내 든 물병의 무게감마저 평소와 달랐다. …왜 하필이면 오늘이야. 오늘만 버티면 주말인데. 왈칵 올라온 짜증에 무심코 고개를 젖힌 백기는 온 세계가 도는 느낌과 함께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금요일 아침, 눈에 들어온 시계는 아침 여섯 시 이십사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아침밥을 밀어 넣다, 얼마 못 가 도로 다 게워냈을 땐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셔츠 안에 히트텍, 셔츠 위에 니트 베스트에,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제일 두꺼운 코트까지 걸치고 캐시미어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 집을 나섰는데도 욕이 나올 정도로 추웠고. 해열제를 먹어서 어느 정도 열은 내려갔다지만 여전히 눈앞은 흐릿한데다 다른 사람들과 스치기만 해도 온몸이 징 하고 울렸다. 평소처럼 출근하려고 버스를 타고 나서야 택시라는 수단이 떠오른 탓에 그야말로 지옥 같은 출근길이었다. 학교 다닐 때였으면 아무 고민 없이 자체휴강하고 집에서 죽은 듯이 잠만 잤을 텐데.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 어떻게든 사무실에 도착한 백기가 느릿느릿 늘어지는 손길로 목도리를 풀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잘게 몸을 떨었다.


출근도 칼 같이. 특별한 일이 있을 때가 아니고서는 항상 아홉시 되기 15분 전에서 10분 전에 출근하는 해준이라 옆자리는 아직 비어 있다.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강, 해, 준, 하고 해준의 이름을 불렀다.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흐트러짐 없이 항상 완벽하고 섹시하기까지 한 사람이 이름도 해준이라니…. 신은 공평하다고들 하는데, 해준을 만든 걸 보면 가끔 안 그럴 때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넋을 놓다시피 한 백기를 현실로 돌아오게 한 건 다인이었다. 백기씨 일찍 오셨네요? 맑은 목소리에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아 네. 대답하는 백기의 볼이 붉어, 다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화할 수 있는 스트레스의 한계치를 넘은 몸은, 고작 약 몇 알로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앉아서 전화를 받고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두드리는 게 지금의 백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시야가 일그러지며 도는 탓에, 오늘은 해준의 옆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도 완벽한 사수는, 부사수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듯 혼자 바쁘게 일하고 있다. 평소였다면 또 자괴감에 빠졌겠지만 백기는 지금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집에, 가고 싶다. 아직 점심시간 되려면 20분이나 남았는데… 어떻게 견디지… 이미 몇 번이나 깨물어서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다시 깨물며, 백기가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만 더 견디면 점심시간이니까, 그 때 눈 좀 붙이면 될 거야.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타이밍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오전 내내 제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던 해준이 입을 뗐다.


“장백기 씨.”
“……네.”
“재무회계실 다녀오세요. 가면, 서류 주실 겁니다. 그거 받아오면 됩니다.”
“알겠, 습니다.”


해준이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오는 ‘모니터 보면서 말하기’ 스킬 덕분에 자신의 몸 상태를 들키진 않은 것 같다. 백기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이 일만 끝내 놓고. 조금만 더 버텨줘. 정신 차리자, 장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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