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하게 추웠다. 눈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얼음이 남았고, 계속 최저기온을 찍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칼바람이 불었다. 12월 어플리케이션이라도 깔아둔 것 마냥, 12월의 첫날부터 뿅 하고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았다. 폭신폭신한 목도리를 하고 나왔는데도 사이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목덜미를 서늘하게 해, 백기는 자꾸 움츠러드는 몸을 의식적으로 곧추세웠다. 이런 날에 웅크리면 더 춥다. 그러다가 욱신거리는 몸 때문에 반사적으로 백기의 이마가 찌푸려진다.

아, 진짜. 한석율. 적당히 좀 하라니까. 오늘 현장 나갈 일이 있다고 한 건 석율이었는데, 당사자인 석율이 이상할 정도로 계속 저를 지분거리다 결국 연달아 두 번은 더 했더랬다. 짧게도 아니고 길게. 아무리 둘 다 건장한 성인 남성이고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몸이라고 해도 그 정도면 지친다. 백기는 뇌 속을 녹일 것 같던 길고 지독한 쾌감에 침대에 엎어져 가쁜 숨을 내쉬며 작게 떨었다. 그런 저의 등허리를 따라 입을 맞추며 후희를 즐기던 석율은, 확실히… 이런 관계가 되고 나서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긴 했다. 덕분에 아침에 깨서 그 길지도 않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몇 번을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그러지 않아도 넓은 집인데, 욕실까지 가는 길이 구만리 같았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켜 놓은 백기가 곧장 탕비실로 향했다. 텀블러를 들고, 뭘로 할까 물끄러미 티백들을 훑는다. 조금 뒤 어, 백기씨. 일찍 오셨네요? 노래하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백기의 귓가를 두드렸다. 그래였다.

“아, 네. 장그래 씨. 좋은 아침입니다.”
“밖에, 되게 추웠나 봐요?”
“네?”
“코하고 볼, 빨개요.”

그러면서 생긋 웃는 그래를 보다 백기가 입술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장그래 씨 입술이 지금 나보다는 더 붉을 건데요. 한석율 그 인간이 그렇게 보기 좋다고 난리거든요. 그래씨 입술은 틴트 바른 것 같단 말이야, 라면서. 자꾸 다른 사람 입술 타령 하면서 키스를 하는 통에 기분 다 잡친 내가 그 입술을 콱 깨물어 주긴 했지만.

……? 제 얼굴에 머무는 백기의 시선이 점점 날카로워지자, 그래가 영문을 모르고 더듬더듬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뭐가, 맘에… 안 드시나?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닙니다.”
“아, 오늘 점심에 약속 없으면 점심 같이 하시죠. 한석율씨는…”
“현장 갔다가 오후 출근이라면서요. 셋이 먹죠 그럼.”
“네. 그럼 나중에 봐요.”

그리고 점심시간. 백기는, 간밤에 석율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굴었는지 알게 됐다.

“한석율씨는 이 추운 날에 현장이네. 생일 같지도 않겠어요.”
“……?! 생, 컥! 콜록!”
“백기씨, 괜찮아요? 여기 물.”

생일이라고? 잘만 넘어가던 밥이 목구멍에 턱 하니 걸렸다. 백기가 안경을 살짝 들추고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영이가 건네준 물을 마셨다. 생일이라니, 누가. 한석율이? 아니 근데, 왜 그걸 내가 이 사람들 입으로 들어야 하는데? 급격히 싸해지는 백기의 얼굴을 보고 그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아침에 탕비실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평소와는 좀 다른 백기가 신기하다. 물론 이유는,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어, 밥 벌써 다 먹은… 백기씨?”
“먼저 일어날게요. 할 일이 생각나서.”

그러곤 진짜로, 미련 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백기가 사라졌다. 남겨진 영이와 그래의 눈이 마주친다. 서로의 눈에 똑같이 떠오른 의아함에, 두 사람은 동시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봐도 할 일 생각난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오늘 끝나고 술 한 잔 할 거냐는 얘기 하지도 못했네요, 결국.”
“그러게요.”

그럼 나중에 카톡이라도 하죠, 뭐. 우리도 일어납시다. 커피 한 잔 하러 가요. 그래가 영이와 나란히 걸으며 폰을 꺼내들었다. 석율에게 아까 백기의 반응을 전해줘야 맞는 걸까 잠시 고민하다, 씩 웃으며 다시 주머니에 폰을 집어넣었다. 이러면, 더 재밌는 걸 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아, 욕하고 싶다. 담배 피고 싶다. 욕을 하면서 아주 맛있게 담배를 피고 싶은 욕망을 겨우 눌렀다. 옥상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자니 머리 끝까지 올랐던 화가 조금 식는 것도 같아, 백기가 아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진정해야지. 진정…

“…에이씨, 진정은 개뿔. 하게 생겼어? 이게 진정할 일이야?”

뭐야, 대체. 왜 나 빼고 다 알고 있는 건데? 한석율 생일을 왜 애인인 나 빼고 다 아는 거냐고, 대체. 자기 집 침대 위에서 나랑 뒹굴 시간은 있는데 생일이란 말 한 마디 할 시간은 없든? 백기는 부재중 전화도, 카톡도 없는 폰이 마치 석율의 얼굴이라도 되는 양 매섭게 노려보다가 아-! 하면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석율의 탓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백기 역시 해준과의 관계가 조금씩 개선되며 하는 일이 늘어난 탓에 요즘 계속 바빴기 때문이다. 석율이 먼저 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물어봤어도 좋을 일이었고.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누가, 애인 생일을… 남이 말해 줘서 아냐고.”

……제일 먼저 축하해 줘야 할 사람이잖아요. 나는. 한석율씨. 이 나쁜 새끼야.




석율이 회사로 복귀했다. [백기씨, 다녀왔어요. 점심 챙겨 먹었어?] 카톡 옆의 시각은 두 시. 물론 답장은 안 했다. 그리고 지금 시간은 세 시. 또 폰 액정을 눈으로 깰 기세로 노려보는 백기를, 해준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점심시간 이후부터 계속 이 상태다. 이따금씩 입술을 깨물고 한숨을 쉬고, 폰을 노려봤다가, 다시 축 처져서 마른세수를 하고. 평소였다면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넘어갔을 자신마저 대체 무슨 일인가 할 정도로, 제 부사수가 이상하다. 해준의 시선을 느꼈는지 움찔한 백기가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저를 바라보는 해준의 두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뭐라고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백기를 위해 해준이 먼저 입을 뗐다.

“장백기씨. 오늘 무슨 일 있습니까.”
“……대리님.”
“말해요.”
“저… 그러니까, 그… 오늘만. 지금, 퇴근해도… 되겠습니까?”

해준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런 얼굴로 물어보는데 안 된다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장백기씨. 안 된다고 하면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얼굴인데요. 속으로 한숨을 쉰 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퇴근하세요. 요즘 계속 바빴으니까 오늘 정도는 빨리 가도 좋겠죠. 해준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언제 울상이었냐는 듯 환해지는 하얀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 웃음에 해준마저 무심코 웃어버릴 정도로, 밝은 미소였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연신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부리나케 가방을 챙기고 겉옷도 그냥 든 채로 뛰다시피 사무실을 나가는 백기의 뒷모습을 보던 해준이 결국 피식 웃었다. 귀엽네.




백기는 사옥을 나오자마자 곧장 뛰어서 근처 베이커리로 들어가 케이크를 샀다. 사고 나와서는, 지각했을 때나 타던 택시를 잡았다. 세 시 십육 분. 밀릴 시간은 아니니까 자취방에 먼저 들렀다가, 그거 챙겨서, 나와서 다시 석율씨네 가서… 백기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폰을 잠금 해제한 백기가 곧장 전화를 걸었다.

“응, 나야 엄마. 엄마, 미역국 어떻게 끓이지? …아프냐고? 아프긴 누가 아파요, 그냥 갑자기 먹고 싶어서. 아냐, 오실 필요는 없고 내가 그냥 해 먹을래요. 재료랑 넣는 순서만 가르쳐주면 내가 할게. 응.”




아무리 기다려도 카톡 답, 없음. 전화, 없음. ……. 뭐지. 이 위화감은. 석율이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슬며시 자리를 일어났다.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가 철강팀 사무실을 멀리서 살피는데, 백기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엥? 뭐야. 왜 자리에 없어. 어쩔까 고민하던 석율이 빠른 걸음으로, 그러나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해 가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노트북, 꺼져 있음. 곰돌이 컵, 깨끗함. 가방 없음, 코트도 없음……? 통화를 막 끝낸 해준이 석율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 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 네, 어… 백기 씨…는, 자리에 없네요?”
“퇴근했습니다.”
“……퇴근, 이요?”

퇴근? 퇴근이라고 하셨습니까? 석율의 눈이 커지고 얼굴 가득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진다. 확 드러날 정도의 변화에 해준이 한 쪽 눈썹을 올렸다. 오늘 무슨 날인가. 백기도 그렇고, 석율도 그렇고 둘 다 왜 이럴까. 이상한 해준의 시선은 느끼지도 못하는 듯, 석율은 초점 없는 시선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황급히 사라졌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인사는 잊지 않았지만, 나가다 출입문에 이마를 박은 것만 봐도 지금 석율은 제정신이 아니다. 어쩌면, 전혀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들이 유기적인 관계일 때가 있는데…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해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백기야, 퇴근했어? 어디 아파?]
[전화 좀 받아봐.]
[장백기. 예쁜아.]



“와, 나, 미치겠네 진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모든 힘을 실어서 한 대만 명치를 세게 올려쳐 주고 싶은 사람이자 옥탄 같은 성준식은 또 석율에게 일을 떠넘겼다. 문제는 그 일이 아무리 생각해도 정시에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것. 생일에 월차 내고 쉬어도 모자랄 판에 현장까지 갔다 왔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야근이요?”
“…성대리님이에요, 또?”
“망할 성시오패스, 내가, 어휴, 아오. 아오 ㅆ…!!!”

그럼 술 약속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네요. 쓴웃음을 지은 영이의 말에 그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럼 먼저 가볼게요. 하 대리님 회의 들어가셔서. 한석율씨, 힘내요.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멀어지는 영이를 보다 석율이 결국 휴게실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애인은 카톡도 씹고, 전화도 안 받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나오는 건 한숨뿐. 그래는 석율을 조용히 내려다보다,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석율을 불렀다.

“한석율 씨.”
“왜, 그래.”
“…장백기 씨한테 말 했습니까?”
“응? 뭘.”
“오늘 한석율 씨 생일인 거.”
“…….”

콰과과광. 아마 지금 배경음악을 깔아야 한다면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겠지. 벌떡 일어난 석율이 잠시만, 잠시만? 하더니 휴게실을 누비며 기억을 되짚었다. 하려고 했는데, 요즘 둘 다 바빠서… 그리고 어제 하려고 했는데 오늘 현장근무 한다는 거에 좀 열도 받았었고, 백기와 몸을 맞대는 것도 오랜만이어서… 어…?

“망했다….”
“점심 먹으면서 말 꺼냈더니, 백기 씨 얼굴이 굳어지더라구요.”
“아, 진짜, 아- 아, 진짜 엿 같네…”
“…….”

석율은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아 제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어쩐지, 뭐가 계속 맘에 걸리더라니. 그냥 현장 가서 너무 바빴던 탓에 연락을 못 한 것 때문에 화가 났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럴 시간 있습니까?”
“뭐가아아아.”
“저라면, 야근 안 합니다. 어떻게든 빨리 끝내 놓고, 집에 가겠어요.”

시간 아까우니까, 빨리 가서 일하시죠. 힘내요. 석율의 등을 쫙, 하고 후려친 그래가 갑니다, 하고 사라졌다.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다. 아, 진짜… 예쁜 사람이 예쁜 짓만 골라 하네. 장그래씨. 뭐, 그래도… 우리 백기씨가 더 예쁘긴 하지만. 그래가 들었다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하는 표정을 지었을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석율이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미역국 OK. 밥 OK. 밑반찬이야 석율의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것들이 냉장고에 아직 한가득이다. 테이블 한가운데에 케이크를 올려놓은 백기가 그제야 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카톡, …난리 났네. 손가락을 움직여 한 마디, [퇴근하면 집으로 곧장 올 것.] 라는 카톡을 보내 놓고 욕실로 들어간다. 옷을 벗다 말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하얀 몸에 찍힌 울긋불긋한 흔적이 보여 멈칫. 순간 어제 저를 뜨겁게 안던 석율이 떠올라, 몸을 타고 저릿저릿한 감각이 올라와서 백기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변태도 아니고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그나저나, 손가락이 좀 아프다. 역시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수십 번 정도 연습을 하니 몸이 저절로 기억해서 다행이지만. 석율이 안 좋아하면 어쩌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도리질 친 백기가 샤워를 시작했다. 창밖으로는 조금씩 어둠이 내리는 중이었다.


그래의 말대로, 석율이 전에 없던 집중력으로 간신히 일을 끝냈을 때 시계는 여섯 시 이십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카톡을 확인하고는 나 지금 퇴근! 이라고 답을 해 놓고 택시를 잡아타고 나름대로 지름길로만 달려 집에 도착한 석율이 도어락을 풀고 들어서자마자 백기를 불렀다. 예쁜아. 백기씨?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서니 테이블에 뭔가를 놓고 있는 백기가 눈에 들어왔다. 석율이 선물했던 하얀 앙고라 니트에 수면바지를 입은 백기가 힐끗 석율에게 시선을 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와서 밥 먹어요. 조금 뾰로통하면 어떠랴. 오늘 내내, 그렇게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다. 가방을 휙 던져 놓은 석율이 걸어가 백기를 품에 안았다. 싫지는 않은지, 밀어내지 않고 제 어깨에 고개를 묻는 백기를 더 세게 안으며 귓가에 속삭인다. 보고 싶었어. 내 꺼. …나 왔는데, 다녀왔습니다 뽀뽀 안 해줘?

“…미워서 안 해 줄 겁니다.”
“……화 많이 났어?”
“…….”

석율의 물음에도 아무 답 없이 한동안 안겨 있던 백기가 고개를 들었다. 흠칫 놀라며 눈을 치켜뜨는 석율의 목을 감고 그대로 키스하는 백기 덕분에 석율의 몸이 순간 경직된다. 입술을 깨물고 핥고, 도망치는 혀를 끝까지 쫓아가 기어코 제 입술로 빨아들이는… 말 그대로, 키스였다. 너무 당황해서 눈도 감지 못한 석율에게, 입술을 뗀 백기가 숨을 섞어 낮게 말했다.

“내가. 내 애인 생일을. 다른 사람 입으로 들어야 합니까?”
“…백기야. 예쁜아, 그게.”
“알아요. 우리 둘 다 바빴으니까. 나도 안 물어본 거 잘못했고. 그래도, …힌트라도 줬어야죠.”
“……미안.”
“알았으면 됐어요. 밥이나 먹어요. 미역국은 먹었어?”

맛없어도 책임 못 져요. 백기가 말하고 나서야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들이 자신의 생일상이라는 걸 안 모양인지, 석율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거… 이거…

“이거 뭐요.”
“……예쁜이가 한 거야?”
“그럼 뭐, 나 말고 집요정이라도 키웁니까?”

됐고 빨리 밥 먹어요. 나 무지 배고파.



후식은 자기가 준비하겠다며, 석율이 케이크를 자르고 커피를 내리는 사이 백기가 구석에 감춰 놓았던 걸 꺼내놓았다. 실수하면 안 되는데…. 손을 쥐락펴락, 손가락 운동도 해 본다. 예쁜아, 거기서 뭐해요. 케이크 먹자. 등 뒤로 석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나도 몰라. 모르겠다 이제. 질끈 눈을 감고, 백기가 걸어가 석율의 앞에 앉았다.

“……지금 들고 있는 거, 기타 아니야?”
“기대하지 마요. 나 기타 몇 년 만에 잡아본 거니까. 그냥 들어. 말하지 말고.”

웃기면 웃어도 되는데, 다 끝난 다음에 웃어요. 마지막으로 엄포를 놓은 백기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한 번 심호흡을 크게 한 백기의 손가락이 기타를 연주하고, 이윽고 입술 사이에서 노래가 흘렀다.

내 뜨거운 입술이 너의 부드러운 입술에 닿길 원해
내 사랑이 너의 가슴에 전해지도록…
아직도 나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다면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널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겠어, 언제까지나
널 사랑하겠어, 지금 이 순간처럼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널 사랑하겠어…

석율의 표정을 보는 것이 두려워,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노래를 끝내고 나서야 백기는 슬쩍 눈만 치켜떠 석율을 살폈다. ……반응을 좀, 하지 그래요…? 저기요? 기타를 내려놓고, 석율이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가는데 석율이 백기의 허리를 잡아 휙, 하고 끌어당겼다. 그러니까 지금 자세가, 석율의 허벅지 위에 앉은… 조금… 민망한 자세다.

“…뭘 믿고 이렇게 예쁘냐, 장백기.”
“무슨…”
“……진짜 너, 심장에 안 좋을 정도로 예뻐.”
“뭐라는 겁니까. 내년 생일엔 좋은 거 선물해 줄게요.”

필요 없어. 내년 생일에도, 그 다음 생일에도, 너만 있으면 되니까. 이마를 맞대고 속삭이는 석율의 달콤한 목소리에 백기가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생일 축하해요. 석율씨.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댔다.

진짜로,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

소파에 앉은 채 키스를 주고받다가, 먼저 불이 붙은 쪽은 석율이었다. 니트 안으로 들어온 손이 끈질기게 가슴팍과 허리를 쓸자, 백기도 항복. 소파에서 일을 치룰 기세인 석율을, 백기가 애교 섞인 키스로 겨우 달래 2층까지 올라왔다. 침대에 저를 눕히고 이곳저곳 키스를 퍼부어 오는 석율의 머리칼에 손을 넣어 헤집으며 백기는 눈을 감았다. 생일이니까, 좀 봐 주지 뭐.

... 는 무슨. 인간아, 정도를 좀.. 지키라고!


"하아, 흐, 석율-.. 좀.. 아..!"
"미안, 후으, 자제가 안, 된다. 그러게, 누가-"
"흐으..!"
"예쁜 짓, 하래?"

그게 누구 때문인데..! 어제도 할 만큼 해놓고서, 대체, 이 인간 체력의 끝은 어디인가. 정신없이 포인트만 찔러대는 통에 흐르는 생리적인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백기가 손을 뻗었다. 안아줘요. 무언의 몸짓을 캐치한 석율이 씩 웃으며 백기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 끌어당겼다.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몇 번 반복하다 키스가 되었다. 입 안의 여린 살을 훑어내는 석율의 혀에, 백기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까지 남김 없이 혀로 핥아낸 석율이 귓가에 속삭였다. 고마워. ...사랑해.

그 말에 백기도 다시 무너진다. 치사하게, 이럴 때 그런 목소리로 말하다니.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석율의 두 뺨을 감싼 백기가 입술을 맞댄 채 답했다. 내가 더 고마워요.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석율의 생일이 막 지나간 밤이었다.

 

by R_i_a_n 2015. 4. 27.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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