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의 모든 순간 (달아요 외전)


으응. 우으… 바스락. 봉긋한 시트 속에서 쏙, 하고 백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잠이 잔뜩 묻은 나른한 눈을 깜빡이며 아직 어둑어둑한 주위를 살피다, 이내 다시 고개를 베개에 파묻는다. 코끝에 닿는 익숙한 해준의 냄새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샌다. 어제 처음으로 해준의 집에서, 그리고 온전한 해준의 공간인 침실에서 몸을 맞댔다. 백기는 들어오자마자 저를 감싸는 해준의 향기에 정신을 못 차렸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장해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다가, 해준이 제 뺨에 손을 댔을 때는 열이 화르르 올라 그의 품으로 무너졌고. 그런 자신의 모습에 해준도 평소와는 좀 달랐던 것도 같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기억이 날아간 부분들도 꽤 있지만, 흐릿하게 머릿속을 스치는 해준의 모습은… 끄으.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백기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기절하듯 잠들어 놓고 겨우 일어나서 할 생각은 아니다. 심장에 안 좋아. 응. 결론을 내리곤 고개를 주억거리는 백기의 허리에, 해준의 탄탄한 팔이 감겨 왔다.

“아… 죄송해요, 저 때문에 깨신…”
“일어나자마자 혼자서 뭐가 그렇게 바쁩니까.”

이 쪽 봐요. 조금 가라앉은 해준의 목소리가 좋아서 잠시 넋을 놓고 있느라 대답하기도 전에 백기의 입술에 촉, 촉, 하고 해준이 짧게 키스했다. 떨어지는 입술이 아쉬워 이번엔 백기 쪽에서 세 번. 쪽쪽쪽. 닿은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나온다. 자느라 흐트러진 백기의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주며, 해준이 백기의 얼굴을 살폈다. 눈, 부었네요. 안 아픕니까. 해준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눈가를 쓸어와, 백기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눈 위로 말랑말랑한 입술이 닿는다 싶더니 말캉하고 따뜻한 혀가 느껴졌다.

“흐으… 간지러, 워요. 대리님.”
“빨리 가라앉으라고 이러는 겁니다.”
“병 주고 약 주시는 겁니까?”
“쿡… 그래서, 싫었습니까?”

싫은 사람치고는 어제 꽤 적극적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군요. 이어지는 해준의 담담한 말에 말려들어 페이스를 잃은 백기가 윽, 하곤 입을 다물었다. 금세 빨갛게 물들어선 원망스러운 눈길로 저를 쳐다보는 백기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해준이 다시 웃는다. 아, 진짜. 그렇게 웃는 건 반칙이라구요. 화도 못 내지 않습니까. 차오르는 말들을 입 밖으로 차마 꺼내 놓지 못하고 백기는 입술만 삐죽였다. 해준은 백기가 토라졌다고 생각했는지, 물끄러미 백기를 바라보다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귀여웠습니다.”
“네에?”
“어제.”
“무…!”
“…아니. 그것보다는 섹시했다고 하는 편이 맞는 것 같기도 하네요.”
“으, 아, 돼, 됐습니다! 대리님, 됐으니까…”

그냥 암말도 마십쇼… 으으… 결국 귀까지 빨갛게 익은 백기가 해준의 등에 팔을 두른 채 어깨에 고개를 묻는다. 해준이 피식 웃고는 백기의 등을 느리게 토닥였다. 아이를 재우듯, 새근새근한 숨소리에 맞춰서. 이러다 또 잠들 것 같아 밀려오는 잠을 고개를 흔들어 떨쳐낸 백기가 해준을 올려다봤다. 동그랗고 큰 눈, 손대면 베일 것 같은 콧날, 자신을 너무나 쉽게 흔들어 놓는 입술, 그리고

“…왜 그렇게 쳐다봐요.”

국어를 하든, 외국어를 하든, 욕을 하든, 듣는 것만으로도 섹시한 목소리. 귓가에서 속삭일 때면 항상 이성을 훌쩍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 놓는 것만 같은 해준의 목소리가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독점하고 싶을 정도로. 해준이 자신의 물음에도 뚫어져라 제 얼굴을 보고 있는 백기의 모습에 의아한 듯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래도 재촉할 생각은 없는지, 백기와 가만히 눈을 맞춘 채 하얀 볼을 매만진다. 해준의 큰 손에 볼을 마주 부비며, 백기가 눈이 휘어지도록 환하게 웃었다.

“멋있어서요.”

백기의 말에 해준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아부해도 나올 거 없습니다. 조금 장난스럽게 대꾸하면서도 제 이마에 입술도장을 찍어 주는 해준 덕분에, 간지러운 감각이 차오른다. 달달하고, 포근하다. 연애를 시작하고 문득문득 찾아오는 불안감은 이게 꿈이라면 제발 깨지 않기를 바라게 했다. 원인터의 대리가 아닌 그냥 남자 강해준을 제일 가까이서 독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백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만큼 무서웠기에. 그러나 해준이 이렇게 다정하게,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이 따뜻하게 저를 안고 만져줄 때면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좋아서, 머릿속이 온통 강해준이라는 남자로 가득 차게 되니까. 생각에 빠져 있는 백기의 목덜미를, 해준이 따뜻한 손으로 쓸며 물었다.

“배 안 고픕니까.”
“…고파요. 맛있는 거 먹고 싶습니다.”
“옷 입고, 씻고 나와요.”

네에. 느릿느릿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옷을 입기 시작하는 백기의 허리에 머물던 해준의 시선은, 백기가 욕실 안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따라붙었다. 불투명한 물소리에 해준이 몸을 일으킨다. 자주 입는 티셔츠에 니트 카디건을 걸치고 일어서자 제법 찬 공기가 닿아왔다. 해 뜰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흐린 건가 생각하며 블라인드를 올린 해준의 눈에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보였다. 눈이라도 오려나.


**


사 먹으러 밖으로 나가려나, 하는 백기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씻고 나와 약간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던 백기의 눈에 보인 건, 요리하는 남자의 뒷모습. 아까까지만 해도 약간 싸늘하던 집 안의 공기는 해준이 요리하고 있는 덕분인지 적당히 따뜻해졌다. 발에 못이라도 박힌 듯, 백기는 멍하니 자리에 선 채로 해준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힐끗 고개를 돌린 해준이 백기를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그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서 뭐 합니까. 이리 와요.”
“네? 아, 네. 네.”

해준의 부름에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걸어간 것까진 좋았는데, 해준의 옆에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매는 백기의 모습에 해준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백기씨. 지금 제 앞에서 재롱떠는 겁니까? 강아지에요?

“네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저, 제가 도울 일이라도…”
“다 했습니다. 맛있게 먹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대리님, 요리도 하십니까?”
“못 할 줄 알았습니까?”
아뇨!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진짜, 너무… 왜 그렇게 완벽하십니까. 고개를 세차게 젓다가 배시시 웃으며, 용케 해준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백기가 한 말에 해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소녀 같은 제 애인은 가끔 이렇게 가감 없이 솔직하게 굴 때가 있다. 특히 감정에 관한 한, 놀랄 만큼 비밀이 없었다. 회사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삼키곤 했던 과거의 반작용일까. 단 둘이 있을 때는 해준이 신기하게 여길 정도로 직설적인 표현을 썼다.

좋아합니다.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계속, 쭉, 봤으면 좋겠어요.
대리님 일 하고 계시는 모습 보는 것만으로도 가끔 어지러워요. 너무 멋있어서.
대리님이랑 있으면 진짜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빨리 뜁니다. 살아 있는 게 새삼 실감이 날 정도로요.
…사랑해요.

저를 보는 두 눈은 항상 반짝반짝. 별이라도 품고 있는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그 눈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가득 차오르는 감정에 해준마저 혼미해지곤 했다. 사실은 백기가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속삭여주고 싶었다. 예쁘다든가 귀엽다는 그런 상투적인 말 말고, 내 곁에 와줘서 고맙다고. 영원이라는 게 있다면, 앞으로 내가 너를 사랑할 날들이라는 가슴 벅찬 고백을. 그러나 그렇게 입 밖으로 내면 정말 자제하기 힘들 것 같아서 해준은 그저 눌러 담을 뿐이었다. 강해준의 세상이, 그리고 그 세상의 법칙이 장백기라고 말하면, 어린 연인은 부담스러워서 도망가 버릴지도 모르기에.

생각에 빠진 해준을 물끄러미 보던 백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무데도, 안 갑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저 여기 있어요. 제 자리는, 대리님 옆입니다. 아무데도 안 가요. 떼어놓으시려고 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해준이 뜬금없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는 듯 백기의 눈을 마주 보고는 침묵을 지켰다. 백기는 해준의 입술에 살짝 입술을 대며 말했다.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대리님 눈을 보니까.”

정말, 어디까지 예뻐질 작정일까. 이 앙큼한, 소녀 같은 애인은. 저를 보며 웃는 백기의 입술에 해준이 이끌리듯 키스했다.


**


주말은 언제나 그렇듯, 특별히 하는 거 없이도 쏜살같이 시간이 흘러간다는 걸 실감하곤 한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후식으로 해준은 블랙커피를, 백기는 우유를 넣은 카페라떼를 만들어 마시고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아 영화를 봤다. 다 보고 나서는 해준의 집에서 제일 근사한 서재에서 책을 몇 권 뽑아든 백기가 해준의 허벅지를 벤 채로 그 책들을 읽다가, 이제 막 잠든 참이었다. 해준이 읽던 책에 책갈피를 꽂아 두고 백기를 내려다본다. 가슴팍에 책을 꼭 안은 채로 잠든 백기에게서 안경을 조심스레 벗겨내고는 책도 살짝 빼서 테이블 위로 올려 두고, 해준은 가만히 백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내린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이 같다. 아직 덜 영글어진 소년 같아서, 저도 모르게 불쑥불쑥 위험한 충동이 드는 것이다.

지이잉. 테이블에 놓인 백기의 폰이 울렸다. 카톡이다. 무심한 눈으로 액정을 보다 다시 백기를 보려 했던 해준의 시선을, 이름이 붙잡았다. 한석율. 해준의 눈썹이 또 움찔, 한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망설임도 없이 백기의 폰을 손에 든 해준이 잠금을 풀었다.

[백기씨, 어디야? 집 안에 있으면 바깥 봐봐. 지금 눈 와요. 첫눈이야!]

……. 으응… 잠결인지 몸을 뒤척이며 백기가 해준의 허리를 꼭 안아 온다. 한 손으로 그런 백기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해준이 폰을 조용히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 날. 그러니까 해준이 백기를 처음 품에 안았던 날, 밤. 백기의 폰으로 자신에게 전화한 석율이 떠올랐다.

- 백기 씨가 보기보다 술에 많이 약해서요. 제 어깨 베고 잠들었거든요, 지금.
- ……그런데요.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가. 알아서 집에 바래다주면 될 것을, 왜 굳이 자신에게까지 전화를 한 건지. 해준의 대답에 묻은 짜증을 석율은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리고

- 근데 문제는 저도 많이 취해서 말입니다. 백기 씨 집까지 데려다 주지를 못 할 것 같아요. 그냥 제 집으로 데려갈까 하는데.
- ……!
- 후우… 강해준 대리님.
- …….
- 게임은… 공정해야죠. 전 분명 말씀 드렸습니다. 늦은 밤에 전화해서 실례 많았습…
- 거기 어딥니까.

기어코 해준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한석율은, 위험한 남자다. 어느 면을 보자면 해준 자신과 동류이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 좋다는 평판이 자자한 그 가면 아래로 본성을 눌러두고 있으니.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도 석율은 종종 백기에게 술 권유를 하곤 했는데,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백기가 석율에게는 유난히 경계를 하지 않는 걸 볼 때마다 해준은 좀 많이 답답해졌다. 제일 문제는, 백기가 정말로 순수하게 석율을 동기로 보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니 혹여나 해준이 백기에게 ‘석율과 사적으로 만나지 말라’ 고 해도, 백기 입장에선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

뒤척이던 백기가 눈을 떴다. 안경이 없어 흐려진 눈을 부비며 부스스 몸을 일으킨다. 해준이 폰을 건넸다.

“한석율 씨한테 연락 왔습니다.”
“……? 무슨…”
“첫눈이라고.”
“네?”

첫눈이 뭐가… 어… 첫눈? 백기의 눈이 동그래졌다. 반사적으로 창밖을 보는데, 저를 끌어당기는 손길에 반항할 새도 없이 그대로, 몸이 소파 위로 눕혀졌다. 그 몸 위로 해준이 올라앉는다. 당황했는지 백기가 입술만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해준을 불렀다. 저, 대리님…?

“왜, 첫눈인데 한석율 씨가 내 애인에게 카톡을 하는지. 납득이 가게 설명해 보세요.”
“예, 예에…?”
“500자 이내로 간결하게. 시간은 1분.”
“대, 대리님?”

1분은 너무 짧지 않습니까? 라고 하던 백기가 멈칫, 하며 해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가만히 눈을 맞추다가 손을 뻗어 해준의 잘생긴 얼굴을 매만지던 백기의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어쩌지… 어떡하지. 대리님이 귀엽다. 어떡하면 좋을까. 자꾸 새어나오는 웃음에 해준이 한 쪽 눈썹을 찌푸려도, 백기의 웃음은 이미 눈까지 반달처럼 접힐 정도로 환해져 있었다.

“왜 웃습니까.”
“귀여워서요.”
“누가?”
“…대리님이요.”

질투하는 남자가 추하다고 누가 그랬던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데. 백기가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해준의 목을 감고, 아래로 끌어당겨 입술을 맞댔다. 아랫입술을 촉, 하고 빨아들이고 할짝할짝 소리가 나게 핥으며 애교 아닌 애교까지 부린다.

“…귀엽다고 했습니까.”

그럼, 이래도 귀여운지. 어디 한 번 봅시다. 백기의 애교 어린 키스를 받고 있던 해준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술을 집어 삼켰다.


**


“흐으, 강, 대리, 님… 하지, 마세요…”

절정 후 나른하니 풀어진 백기의 몸 중에 가장 예민한 부위는 귀였다. 해준으로서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제가 귀를 입술로 자극할 때 녹아내리는 백기 덕에, 괴롭히는 보람이 있다고나 할까. 그런 목소리로 말하면 신빙성 없는데. 무심한 듯 던지는 말이 귀를 타고 흘러드는 순간 백기가 바르르 떨며 해준의 어깨를 쥐었다. 항상 존대를 써 주는 해준이 잠자리에서 이렇게 한 번씩 말을 툭툭 놓을 때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러지 않아도 침대 안에서는 명령과 회유를 교묘하게 사용하는 해준이라서 더 그랬다. ……길들여지는 기분이 이런 걸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백기가 해준의 맨가슴에 이마를 콩- 하고 댄 채 투정을 부렸다.

“……첫눈, 보고 싶었는데.”
“아쉽습니까.”
“음… 조금요.”
“나갈래요?”
“누가 너무 괴롭혀서, 힘이 없습니다. 여기서도 보려면 볼 수 있잖아요.”

그리고 눈보다는 대리님이 더 좋으니까 괜찮아요. 대리님이랑 맞는 눈이 올해 첫눈인 거죠, 뭐. 재잘재잘 예쁜 말만 골라 하는 백기의 몸을 꼭 안으며, 해준이 잠시 숨을 골랐다.

“…장백기 씨.”
“네.”
“……사랑합니다.”
“…….”
“여기 있어줘서. 내 품에 와 줘서. 고마워요.”

해준의 품 안, 하얀 어깨가 떨린다.

“당신의 모든 순간이, 나였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어느 노래 가사가 이렇게 절절한 고백이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다. 해준이 주는 쾌락에 방금 전까지 정신없이 울어 놓고도, 백기는 울컥 치받힌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항상 말보다는 행동으로 더 많은 걸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혼자서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힘들 때에도 말로 위로하기보다 다정한 키스로, 따뜻한 토닥임으로 저를 안아주던 이가 해준이었다. 그런 해준이 처음으로 한 고백에, 가슴이 벅차올라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끅끅거리는 백기를 살짝 품 안에서 떼어놓은 해준이 눈물로 흠뻑 젖은 두 뺨을 쓸었다. 쉽사리 그치지 않는 눈물에 오히려 백기가 더 당황해 입술을 달싹이는데, 해준은 그저 조용히 두 눈을 맞추고 기다렸다. 흐르는 눈물을 끊임없이 손으로 닦아주면서.

바깥엔 눈이 내려 천지가 하얗게 뒤덮인, 토요일의 늦은 오후였다.





+ 보너스 / 강대리님 집에 온 백기


해준의 성격답게, 딱 봐도 잘 정리되어 있는 집이다. 그렇다고 헤집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백기는 넓고 깔끔한 집 안을 눈만 또르르 굴려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백기가, 해준의 눈에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주인을 처음 만나 낯선 곳으로 온 강아지. 거실 소파에라도 앉아 있어요. 라고 짧게 말한 해준이 냉장고 쪽으로 가는 걸 보면서 백기 역시 최대한 소리 나지 않게 걸어 거실로 향하는데,

두근.

……향, 이… 난다. 당연한 거였다. 여기는 해준의 집이니, 모든 공간에 해준의 향이 묻은 건. 그런데, 문제는. 그 향에 지금 자신이 이상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거였다. 해준의 품에 안겨 있을 때 나는 것보다 훨씬 진하고, 위험하다.

“커피 마실래요?”
“네? 아니, 네… 아뇨, 아니, 괜찮습니다.”

무슨 대답이… 횡설수설 하는 백기의 대답에 냉장고를 열었다가 닫고 돌아본 해준이 한 쪽 눈썹을 올렸다. 기분 탓인가, 백기의 눈이 좀 풀린 것 같다. 얼굴도 좀 달아오른 것 같고. 술도 안 먹었는데, 왜일까.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지 걱정이 되어서, 해준은 성큼성큼 걸어 백기 앞에 섰다.

“어디 아픕니까?”
“흐으…”

정적. 볼에 손을 댄 것뿐인데 백기는 무슨 큰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해준의 품으로 무너졌다. 해준이 입고 있는 옷자락을 쥐고 숨을 고르다 기어코 울먹이며 도리질을 치던 백기가 입을 열었을 때,

“여기, 전부… 다, 대리님, 향기가 나서… 이, 이상해요…”

툭, 하고. 해준의 이성이 날아갔다. 그러니까 지금, 아픈 게 아니라. 굳이 말하지 않아도 훤히 보인다. 두 말 없이 백기를 가볍게 안아들고 침실로 걸어가는 해준의 얼굴에도 묘한 흥분이 어리기 시작했다. 강해준의 영역 중 가장 은밀한 중심부에 들어온거나 마찬가지인 백기는 이제 눈앞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침대 위에 백기를 눕힌 해준이 가만히 백기의 목덜미에 손을 댔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뜨겁습니까.”
“흐으, 죄, 죄송합니다…”
“정말로, 장백기 씨는…”

날 곤란하게 만드는 게 재주가 탁월하네요. 낮게 깔린 해준의 목소리가 죽을 만큼 섹시해서 백기가 바들바들 떨며 해준을 올려다봤다. 백기는 자각이 없겠지만 그 눈길은 무척이나 야해서, 해준이 자제력을 잃을 뻔 했을 정도였다. 옷을 벗겨내는 건 쉬웠다. 해준의 향기가 잔뜩 묻은 침대 위, 하얗고 말랑말랑한 몸을 쓸어내리며 해준이 속삭였다. 눈 감지 말고, 나 보세요.

겨우 뜬 눈을 다시 질끈 감으며 백기가 필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숨도 소리도 모두.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물린 백기의 입술 사이로 해준의 손가락 두 개가 파고들었다. 하악, 하아, 아, 웁… 억지로 벌려진 입술 사이로 소리가 터져 나온다. 해준은 그 상태로 입술을 하얀 가슴팍 위로 옮겼다. 움찔 튀어 오르는 허리 밑으로 손을 집어넣고 단단히 감고서는 혀를 놀리자 흐으으, 하고 반응하는 백기의 입 안을 손가락으로 헤집는다. 무얼 해야 하는지, 아이가 아닌 이상에야 알 수 있다. 백기도 혀를 움직여 해준의 손가락을 핥았다. 서툴기 그지없는 놀림이지만 정성스럽다. 상이라도 주듯, 해준이 한 입 가득 살을 베어 물었다. 아읍! 놀란 백기가 얼떨결에 해준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깨물었다고 해 봤자 간지러운 정도인데, 깨문 사람이 더 사색이 되어선 방금 물었던 자리를 할짝할짝. 불명확한 발음으로 죄송하다고 하며 손가락을 핥는 백기 덕분에 불이 붙은 건 해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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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_i_a_n 2015. 4. 27. 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