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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백 영화 합작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Fascinate

 

 

 

“이나 씨! 편집장님 출근하셨어요?”

“……아직요.”

“아, 살았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흐아아. 괴상한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기 무섭게 책상을 짚고 주저앉다시피 하는 백기의 등을 보던 이나의 한 쪽 눈썹이 내려갔다. 가쁜 호흡 탓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어깨가 젖어 있다. 두 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오느라 우산을 쓸 여유도 없었겠지. 그렇다고 해도 머리까지 젖은 건, 편집장님이 보면 뭐라고 할 텐데. 분명히. 톰 포드의 와일드 진저 립스틱을 꼼꼼하게 칠한 입술 사이로 가는 한숨이 흐른 순간, 백기가 벌떡 일어섰다. 꾸물거릴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처럼. 젖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거릴 만큼 빠르게 걸어가 벤티 사이즈의 커피를 텀블러로 옮기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다. 손이 덜덜 떨린다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지만, 용케도 흘리지 않고 무사히 성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나의 시선 끝이 자신의 손목으로 향했다. 요즘 그녀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어 손목에서 떠나지 않는 로즈몽의 시계는 백기에게 남은 시간이 2분임을 알리고 있었다. 물론, 그걸 알려줄 마음이 이나에게는 추호도 없었지만. 책상 위에 텀블러를 올리고, 그 옆으로 오늘자 신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놓아두기 바쁜 백기를 뒤로 한 그녀가 손거울을 들었다. 머리, OK. 화장, OK. 몸을 돌려 통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까지 전부 확인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크리스찬 루부탱의 빨간색 하이힐을 신자마자, 문 너머 복도의 끝에 그가 보였다. 아아. 꾸물거리다가는 또 한 소리 듣지. 뭐 하느라 아직도 책상 앞이야? 쯧. 짧게 혀를 찼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사한 웃음을 지은 이나가 열리는 문을 살짝 잡았다. 패션 잡지 Fascination의 편집장 강해준의 출근 시간은 오늘도 칼같이, 오전 여덟시 오십오 분.

“오셨어요, 편집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해준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 하며 이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시 한 번 마주 인사하는 이나의 눈이 자연스럽게 해준을 담았다. 몸에 딱 맞는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네이비 슈트.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카프스킨 더비슈즈와 색을 맞춘 카멜 색상의 벨트. 센 바람에 사방팔방으로 흩날리는 빗줄기의 흔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도 없다. 오늘도 완벽한 강해준 편집장의 자태에 속으로 감탄하던 그 때.

“안녕하십니까!”

“…….”

우렁찬 백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사무실 안을 채웠다. 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느라 책상 옆을 떠나지 못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후다닥 해준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허리 숙여 인사하는 백기를 보는 이나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고, 해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기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놓고도 해준을 바라보지 못했다. 날아올 꾸중을 대비하듯 입술 안쪽을 꾹 깨무는 하얀 얼굴을 보던 해준은 한 마디와 함께 백기를 지나쳐 책상 앞에 앉았다.

“비 맞은 생쥐를 사무실에 들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죄, 죄송…”

“나가 보세요. 이나 씨, 오늘 스케줄 확인합시다.”

“네.”

중간에 싹둑 잘려 버린 백기의 말 위로 두 사람의 대화가 쏟아졌다. 우두커니 서 있다가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선 백기가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몇 층 아래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백기 앞까지 올라올 때까지, 길고 긴 한숨을. 이제 막 출근했는데 집에 가고 싶어지면 어쩌란 말이지. 입술 사이로 비처럼 축축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반짝거리던 9층 버튼이 빛을 잃고 문이 열렸다. 숙였던 고개를 들고 걸음을 내딛는데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백기의 귓가를 두드렸다.

“어? 백기 씨네. 안녕?”

“……안녕하세요. 한석율 씨.”

“……. 안녕을 말하는 사람 얼굴이 안녕하지 못한데. 비 맞으면서 뛰어다니기라도 했어?”

으음. 거기다, 또 깨졌구나. 따라붙은 말에 백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부터 장백기를 기죽일 사람은 이 건물에 단 한 사람밖에 없지. 석율이 쓴웃음을 지으며 백기의 어깨를 쥐었다. 손 안에 잡힌 어깨가 화들짝 놀라 들썩이는 게 안쓰러워 부드럽게 주무르며, 석율은 백기를 제 앞으로 세우고 걸었다. 백기로서는 수고를 던 셈이다. 옷매무시를 다듬는 거라면 화장실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젖어서 흐트러진 머리는 뷰티 팀의 도구를 빌리지 않고서는 무리였으니.

“지윤 씨, 자리 좀 빌릴게.”

“어, 네. 백기 씨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뷰티 팀의 작업실을 기세 좋게 열어 재낀 석율에게 등을 떠밀려 의자에 앉은 백기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눈을 내리깔았다. 괜히 미워지고 작아지는 것 같아 요즘 들어 자꾸 거울 보는 걸 피하고는 했다. 석율의 긴 손가락이 안경을 벗겨내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목을 움츠린 백기의 머리 위로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위잉. 고저 없는 기계음이 묘하게 안정적인 느낌이 들어, 백기는 눈을 감은 채 석율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저절로 나른한 숨이 터졌다. 백기의 머리가 깔끔하게 원상복귀 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몇 분. 석율은 빗방울이 말라붙어 더러워진 안경을 닦고 고개를 기울여 백기의 얼굴을 바라봤다.

“벗은 게 더 나은데.”

“네?”

“안경.”

“……주세요, 안 보입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손을 뻗는 백기에게 안경을 건넨 석율이 옆으로 살짝 치우친 백기의 넥타이를 바로 했다. 제가 해도 되는데. …편집장님 보러 가는 길이셨습니까? 미안한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석율이 장난스럽게 윙크를 날리며 대답했다. 이제 가면 되지. 같이 가. 작업실을 나서서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석율은 입고 있던 도트 무늬 셔츠의 소매를 척척 접어 올렸다. 유행하는 가요를 콧노래로 부르며 발걸음도 가볍게 해준의 사무실로 들어서는 석율의 뒤를 따라 백기도 제 자리를 찾았다.

“이나 씨, 좋은 아침. 립 예쁘네, 오늘. 힘 좀 줬는데?”

“금요일이잖아요. 어차피 곧 마감 들어가면 이렇게 챙기지도 못 하는데. 편집장님 기다리세요.”

“안 그래도 뒤통수 따가워서 얼른 들어가야겠다. 가요, 가.”

해준을 등지고 있던 석율이 사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무섭게 이나가 백기의 책상에 손을 짚었다. 움찔, 하며 고개를 든 백기를 보는 그녀의 눈길은 여전히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백기는 오전 업무시간 동안 제가 해야 할 일들을 줄줄 읊기 시작하는 그녀를 멍하니 보다가 급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여기 온 첫 날, 기억력에는 아무 문제없다고 자부하다가 낯선 용어들의 바다에 허우적대며 실수를 연발한 뒤로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는 중이었다. 지금처럼.

“…점심 먹고 나선 편집장님 인터뷰 스케줄 최종 확인하고 질문지 체크해요. 예약된 카페도 확인 한 번 더 해 두고. 뷰티 팀엔 내가 오전 중에 전화해 둘 테니까 시간만 맞춰서 불러요. 차 대기시키는 거 제발, 늦지 않게.”

“알겠습니다. 더 할 일은… 없을까요?”

“없을 겁니다, 아마.”

“네.”

전화벨 소리에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 백기에게 손을 내저은 이나가 반대쪽 제 자리에 앉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Fascination 강해준 에디터 사무실입니다. ……아,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바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대화할 때보다 높은 톤의 목소리를 들으며 백기가 인터넷 창을 띄웠다. 이제는 익숙한 메일 확인 작업을 할 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 외국어로 가득한 문서가 차라리 더 반가울 줄은 꿈에도 몰랐었는데. 메모와 메일을 번갈아가며 훑고 분류하는 백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간다.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때면 늘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가 된 기분이지만, 오늘은 유독 더 심한 느낌이 들었다. 패션의 패자도 알지 못하는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백기는 새삼스레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떨쳐내려 고개를 저었다.

 

 

“응, 지금 나가. 5분 쯤 걸리겠다.”

일어나 얇은 코트를 걸치며 통화하는 이나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다. 점심시간이구나. 창문을 두드리던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그것도 모를 만큼 모니터와 씨름하는데 열중하느라 뻑뻑한 눈을 꾹 감았다 뜬 백기를 향해 이나가 눈짓했다. 백기 역시 가벼운 고갯짓으로 대답하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나가며 열린 문 사이로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이 들려왔다. 아직 해준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슬슬 나가셔야 할 텐데. 오늘은 매거진 M 스타일의 본부장님과 식사였나. 그나저나 메일은 왜 이렇게 안 와? 습관처럼 입술을 깨물며 페이지를 새로 고침 해 보지만, 새로 도착한 메일은 여전히 0개. 전화 한 번 더 해볼까. 키보드 위의 하얀 손가락이 피아노를 치듯 움직이는 순간, 백기의 코끝에 해준이 쓰는 향수 냄새가 밀려들었다.

“차는.”

“대기 중입니다.”

식사 맛있게 드십쇼. 백기의 인사에 해준이 무어라 대답하려 할 때, 전화벨이 끼어들었다. 기다리던 전화인가 싶어 벨 두 번이 울리기도 전에 받는 백기의 얼굴에 해준의 눈길이 머물렀다. 아주 잠깐이었다. 해준은 이내 미련 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백기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왼쪽으로 수화기를 바꿔 들고 메일을 확인하느라 바빴다. 오늘 예정되어 있던 해준의 인터뷰 질문 목록이 드디어 나왔다. 늦은 게 미안했던지 연신 사과하는 상대방에게 백기는 아니라는 말을 하면서 눈으로는 목록을 꼼꼼하게 훑었다. 꽤 빽빽하네. 기본적인 프로필에 대한 질문은 그렇다 쳐도, ……영화나 음악이나 여자 취향은 왜 물어보는 거지. 다른 질문도 아슬아슬한데. 이런 거 필요한가? 판매 부수가 올라가니까 그런가. 백기가 볼을 긁적이다 입을 열었다.

“지금 점심시간이니까 편집장님 돌아오시면 바로 검토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늦어도 한 시 사십 분 전까지는 끝날 겁니다.”

- 감사합니다. 점심 맛있게 드세요.

모르긴 몰라도 이 질문지에 있는 거, 반 이상은 잘려 나갈 것 같은데……. 다른 질문도 많이 준비했겠지? 백기는 전화를 끊고 어딘가 시원치 않은 얼굴로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다 일어섰다. 사무실의 불을 전부 끄고 난 다음 밖으로 나가 카드키로 문단속까지 하고 나서 손목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은 벌써 15분이 지나 있었다. 계단 타고 올라갈까. 어차피 직원 식당에 사람 빠지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할 테니까. 이제야 밥을 넣어달라고 울려대는 배를 쓸며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서는 밥이고 뭐고 자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코타 치즈를 듬뿍 얹은 샐러드, 렌틸콩을 포함한 몸에 좋은 곡물들과 닭 가슴살이 들어간 필라프, 콘 스프. 점심 식사를 앞에 두고 식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바라보는 백기의 시선이 멍하다. 회사의 특성상 캐주얼한 차림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데, 그 분위기가 아직 낯설었다. 너나 할 거 없이 엇비슷한 정장을 입거나 단정함을 추구하는 보통 회사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화려한 패션만큼이나 눈에 띄는 머리색까지. 방금 막 식당을 나간 사람의 실버 블론드 머리에 정신이 팔린 탓에 백기는 들고 있던 콘 스프를 입이 아니라 턱으로 먹는 실수를 저질렀다. 아, 뜨거.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주눅이 든 백기의 어깨가 한껏 처진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며 꾸역꾸역 식사를 끝낸 백기가 식기를 정리하고 예의바르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넸다. 걸음을 옮기자마자 귀에 익숙한 단어가 꽂혀 우뚝, 멈춰 선 백기의 옆으로 직원들이 지나갔다.

“나 아까 엘리베이터 기다리는데 강해준이 타고 있는 거야. 한 발짝 걸었다가 얼굴 보고 비명 지를 뻔했어.”

“대박. 나 계속 스튜디오에 있느라 못 봤는데. 오늘 뭐 입었대?”

“아르마니, 네이비. 청량감이 아주 그냥, 어휴. 아, 커프스 버튼 되게 예쁘더라.”

아아. 그게 아르마니 정장이었구나. 커프스 버튼이… 있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런 게 있었는지, 무슨 색이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백기의 한 쪽 입술이 삐죽 올라갔다. 밥을 먹을 때마저 완전히 자유로워지질 못하는구나.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강해준이 누구던가. 한국 최고의 패션 잡지라는 Fascination의 최연소 ‘남성’ 편집장. 엘리트 코스를 거친데다 타고난 감각으로 외국에서도 주목하는 패션계의 ‘악마’가 강해준이다. 공평하다는 신이 강해준을 만들 때는 본분을 잊기라도 한 건지, 완벽에 가까운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미움을 아낌없이 받고 있는 천덕꾸러기가 바로,

“……나지. 나.”

장백기.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까지 강해준이란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고, 패션 브랜드라고는 샤넬밖에 몰랐으며, 명품은 공공의 적이라고 믿어왔고, 옷장에 정장보다 맨투맨 티셔츠와 청바지가 더 많은 평범한 사람. 옥상에 다다른 백기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틈으로 쏟아지는 빛에 가만히 눈을 감고 한 걸음, 한 걸음.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 백기가 난간에 비스듬히 기댔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쯤이라 건물 아래는 차와 사람들로 빽빽했다. 무심한 눈으로 아래를 보던 백기는 문득 드는 담배 생각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잘 피우지도 않던 담배나 많이 마시지도 못하는 술 생각이 요즘 부쩍 늘었다. 그래도 오늘 퇴근하고 나면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으니까. 오늘은 금요일이니, 출근 생각 안 하고 마음껏 놀 수 있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앙다물며 웃은 백기가 제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정신 차리고 일 해야지. 기지개를 쭉 켜느라 젖혀진 고개 덕에, 맑은 하늘이 눈 가득 들어왔다.

 

 

백기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질문지를 받아든 해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가, 백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망했다. 그냥 검토 받기 전에 내 선에서 질문 빼 달라고 요청할걸 그랬어.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들고 있던 종이를 책상 위로 떨어뜨린 해준이 입을 열었다.

“Lookbook 42호에 강해준 인터뷰 넣고 싶으면, 질문 바꾸라고 하세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질문들로 8페이지나 낭비하겠다고 하는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군요.”

“……알겠습니다.”

“두 번째 질문지도 이런 식이면 인터뷰 접습니다.”

나가 보세요. 백기는 한 발짝 내딛어 해준의 책상에 떨어진 질문지를 최대한 빠른 손길로 집어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편집장님, 이시은 디자이너 전화 있습니다. 3번이요. 이나의 목소리가 아득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예정된 인터뷰 스케줄은 네 시. 지금 시각은 한 시 이십 분. 조금이라도 빨리 질문을 확실하게 받아놓지 않으면 굉장히 피곤한 사태가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백기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 네, Lookbook…

“안녕하십니까, Fascination 강해준 에디터 비서 장백기입니다.”

- 아, 네. 질문 확인하셨나요?

“질문 내용 일부를 수정해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할까요?”

예상했다는 듯, 수화기 너머에선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대답과 함께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저절로 나오려는 앓는 소리를 한숨으로 대신하며 백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까일 걸 알았으면 애초부터 넣지를 말란 말이야. 왜 사서 고생을 하는 건데? 저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스케줄 한 시간 전에 엎고도 남을 악마 강해준이라고. 저 인간이 방금 뭐라고 한 줄은 알아? 했던 말 그대로 읊었다간 한 대 때려주고 싶을 걸. 질문 제대로 안 만들면 8페이지가 허공으로 날아갈 거야. 결국 5분여의 통화 끝에 사생활을 건드리는 질문들은 다 뺀, 알찬 질문지를 메일로 받았다. 아트 팀에서 올려 보낸 바인더 북을 보고 있는 해준의 옆으로 백기가 다가서자마자 해준이 한 손을 들었다. 새로 인쇄한 질문지를 건넨 백기의 입술이 또 깨물린다. 무심하지만 날카로운 해준의 시선이 종이를 한 번 훑고, 백기를 향했다.

“됐습니다.”

나이스. 살았다. 하마터면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칠 뻔했다. 그랬다간 어디 아프냐는 일침이 날아왔겠지. 백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해준은 옆으로 밀어뒀던 바인더 북 두 개를 톡톡 두드리며 턱짓했다.

“이거 아트 팀에 갖다 버리고, 내 말 그대로 전하세요. 봄바람 불어서 들뜬 건 알겠는데 책도 들뜨면 어쩌자는 겁니까. 엉망진창이네, 아주. 다들 회사로 출근하는 대신에 꽃놀이라도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줄 수 있는데. 그게 싫으면 주말동안 놀 생각 말고 새 디자인 뽑는 게 좋을 겁니다.”

나가 보세요. 기다리던 말이지만, 바인더 북을 껴안은 백기의 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이나에게 아트 팀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내려가는데 벌써부터 귓가에 사람들의 탄식과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 성 팀장님 안 계시면 좋겠는데. 백기의 작은 소원은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3층에 도착해 가장 먼저 본 사람이 준식이었으니.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준식이 작업실을 나오며 백기를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몇 분만 늦게 올 걸. 꾸벅, 인사하는 백기의 얼굴에 곤란함이 가득하다.

“안녕하십…”

“인사는 됐고. 용건 있어?”

“……이거, 요.”

준식은 바인더 북을 들어 보이는 백기를 보곤 낮게 혀를 차며 머리칼을 헤집었다. 아, 진짜. 강해준. 짜증이 잔뜩 묻은 목소리에 백기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문 열고 들어가. 고갯짓하는 준식의 앞으로 백기가 한 발짝 내딛어 문을 열었다. 모델만큼이나 마른 몸이 그 사이로 쏙, 들어간다.

“팀장님, 커피는요? 왜 벌써 오… 어. 백기 씨.”

“커피가 문제니 지금? 오늘 약속 다 취소해.”

“…아, 안녕하세요.”

작업실의 공기가 단번에 가라앉았다. 가시방석 위에 있는 것 같다. 백기가 꾸벅 인사하고 책상에 바인더 북을 내려놓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또? 아, 진짜. 미치겠다. 돌겠네. 미쳤나봐, 진짜. 이어지는 말들이 마치 칼이 되어 저를 찌르는 것 같아, 백기는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뭐 해? 읊어. 강해준이 이걸 그냥 주진 않았을 거 아냐.”

“아뇨, 별 말씀 없으셨습니다.”

“거짓말하면 재미없어. 그럼 이거, 그대로 다시 편집장한테 갖다 줄래?”

“…….”

준식의 재촉에 결국 백기의 입술 사이로 독 묻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해준이 했던 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백기가 입을 다물자마자 정적에 휩싸인 작업실 안에 준식의 욕설만 작게 울렸다. 망할 놈. 민트 색 니트의 소매를 신경질적으로 걷어붙인 준식이 안에 받쳐 입은 셔츠의 단추를 툭, 툭, 풀었다. 발끝만 보고 선 백기를 흘끗 바라봤다가 짧은 한숨을 쉰 그가 백기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죄 졌냐? 안 잡아먹어. 강해준이 나쁜 놈이지, 네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죄송합니다.”

“한두 번이야? 됐어. 니들, 들었지? …가봐, 바쁘잖아. 편집장님이 어지간히 공사다망하셔야지.”

팀장님, 진짜 약속 취소해요? 오늘 불금인데. 시끄러워. 백기는 우는 소리를 뒤로 하고 서둘러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사무실로 돌아가자마자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이나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들리지도 않을 만큼 가는 한숨을 쉬는 백기의 얼굴이 유독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야, 너 얼굴… 눈 밑에 그늘 장난 아냐.”

“강해준이 진짜 악마긴 한가봐? 이러다 애 잡겠다.”

“아, 다 시끄러, 너네…….”

꿀꺽꿀꺽, 잘도 넘어간다. 맥주가 이렇게 맛있었던가? 약속장소에 도착해서 물마시듯 잔을 순식간에 비운 백기가 닭다리를 턱 집었다. 야무지게 발라낸 뼈를 스테인리스 통 안으로 던져 놓은 백기는 그제야 여유를 찾은 것처럼 숨을 내쉬며 잔을 밀었다.

“더 줘.”

“천천히 마셔라. 쓰러지고 싶어?”

“아, 좀! 준희야, 민이 입 막아. 나 안 그래도 회사에서 많이 들어, 잔소리.”

“걱정되니까 하는 소리지.”

“걱정? 지랄이 풍작이다. 뒷수습하기 귀찮아서 그런 거지. 넌 아직도 나를 그렇게 모르냐?”

“현 민. 시비 걸지 자꾸?”

“왜 니들이 싸워? 웃기네, 진짜. 술 앞에 두고 뭐 해, 안 마시고. 마시라고오.”

잔 비었다고! 꽤 큰 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백기에게 주목하지 않을 만큼 가게는 충분히 시끄러웠다. 고개를 저은 준희가 잔을 채웠고, 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2주다. 백기가 Fascination에 들어간 지 고작 2주가 지났단 말이다. 어떻게 하면 그 짧은 시간 만에 콧대 높고 자신감 넘치던 장백기가 이렇게 변할 수 있지? 눈에 띄게 어두워진 안색 하며 시도 때도 없이 내뱉는 한숨은 제 친구인 백기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새우튀김을 베어 문 백기를 향해 민이 말을 던졌다.

“백기야.”

“왜.”

“그렇게 힘들면 그만둬.”

“……. 그 인간한테, 칭찬 한 마디는 듣고 그만둘 거야.”

“오, 아직 살아 있네, 장백기.”

준희가 피식 웃고는 어깨로 백기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야, 나 장백기야. 왜 이래. 이제 조금 환해진 백기의 낯빛과 씰룩이는 입술 끝이 귀여워 민이 저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말이나 못하면. 야아, 건배 안 해? 건배해, 빨리. 잔을 들고 흔드는 백기의 잔에 민과 준희도 잔을 맞부딪쳤다. 실없는 대화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테이블에 빈 술병이 하나씩 늘어갔다. 비워지는 그릇 대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들이 자리를 채웠다. 이미 눈이 반쯤 풀린 백기가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입가를 닦아냈다. 입 속으로 딸려 들어온 얼음을 강해준이라고 생각하며 아드득 아드득 소리가 나게 씹는 것도 잊지 않고.

“거기서 일하면 모델이나, 그, 뭐라 그러냐? 셀렙? 많이 보지 않아?”

“본 사람 없어?”

사진 없냐? 아님 사인 받은 거. 폰 좀 내놔봐. 둘의 닦달에 백기가 턱을 괴고 포크로 무를 꾹꾹 찌르며 코웃음을 쳤다. 모델? 셀렙? 매일 보지.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국내에서 대체 불가한 존재라는 디자이너 한석율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름을 발음하기만 해도 혀가 꼬이는 해외의 부띠크 샵 오너들, 실제로 볼 거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유명한 모델과 디자이너들, 다른 패션지 관계자들……. 전화와 메일을 주고받고, 혹은 직접 얼굴을 대면하기도 한다. 콘셉트 회의 시간에는 내로라하는 모델들 이름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고가다 해준의 한 마디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백기와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의 중심에는, 그가 있다. 강해준. 야, 뭐 없었어? 민의 재촉에 백기가 나른하게 하품하곤 입을 열었다.

“오늘으은… 인터뷰, 있었지.”

“인터뷰? 누구?”

“강해준.”

“…….”

보통이라면 편집장의 개인 스케줄에 비서가 동석하지 않지만, 오늘은 백기도 같이 있었다. 해준의 인터뷰가 끝나고 난 뒤, 백기 역시 짧은 인터뷰를 했기 때문이다. 100만 대 1의 확률을 뚫고 강해준의 새 비서로 뽑혔다는 이유로. 더불어, 백기의 성별이 남자라는 사실도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한 몫 했던 모양이었다. 인터뷰 장소로 정했던 카페로 출발하기 전에 급하게 연락이 와서, 해준과 같은 차를 탔었다. 그 시간을 백기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숨 막히는 어색함을 어떻게 잊겠어. 어휴.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젓는 백기를 민과 준희가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멍석 깔아줄게. 욕이라도 시원하게 해 봐라. 누구 듣는 사람도 없는데.”

“……. 됐어.”

“담아두면 문드러진다.”

자. 이거 한 잔 쭉, 하고, 말해봐. 시원하게. 너 쓰러지면 택시 태워서 보내주마. 응? 백기는 민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잔 가득 찰랑이는 술을 단숨에 삼켰다.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걸 손등으로 닦아내고 푸욱 한숨까지 쉰 백기가 포크로 피클을 콱, 내리찍었다. 입술 사이로는 다시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다. 그 누구보다 강해준과 가까운 위치에서 그의 일상을 함께하고 있었으니. 아니, 함께한다는 말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뒤쫓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확하겠지. 그를 보고 있으면, 하루가 48시간같이 느껴지고는 했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휴식시간이라고는 밥 먹을 때가 전부인… 그런 워커홀릭의 전형. 흐트러진 모습이라고는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사람.

“……어.”

“응? 뭐?”

“재수 없어!”

“풉!”

“찌르면, 빨간 피 말고, 후우… 녹색 피 나올 것 같아. 오늘, 어어? 아트 팀이 만든, 자료, 나한테 주면서어, 뭐라고 했, 는지, 알아? 이거, 갖다 버리세요. 이러더라니까? 갖다 버리래, 허, 참! 혀로, 응? 사람 죽일 거야, 조만간.”

그것뿐인 줄 알아? 내가, 아침에에, 지 커피랑, 신문이랑, 바리바리 싸들고 출근하느라 우산 쓸 정신도 없었다고오! 근데 뭐어? 비 맞은 생쥐? 생쥐이? 따지고 보면 다 넛 때문 아냐아! 그러게 누가, 원두도 에티, 에티…오피아, 산으로, 벤티 사이즈인 거, 마시래? 신문은 왜 종류별로 읽는 건데? 지인짜 이상한 놈이야, 강해주운. 아까 됐다고 한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백기는 늘어져 있던 팔을 올려 삿대질까지 해가며 열을 올렸다.

“아, 이거 영상 찍어 놓을 걸. 지금이라도 찍을까?”

“아서라.”

“악마가 잘못했네. 그치, 백기야.”

“그으래에! 씨, 더, 짜증나는 게, 뭔 줄 알아아?”

아직 안 끝났나보다. 큭큭 웃는 민을 쳐다보던 백기가 볼을 부풀렸다. 더 짜증나는 건, 그래.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며 저를 괴롭히는 게 취미인 사람이지만,

“……대빵, 멋있다는 거야.”

“뭐?”

“얼굴, 완전, 소멸하기 직전이고…”

“큭.”

“키가아, 그렇게, 큰 것도 아닌데, 비율, 쩔어. 씨. 완전, 짜증나…….”

강해준은, 멋있다. 그 사실은 아무리 백기라도 부정하기 힘들었다. 걸치고 있는 옷이 명품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강해준이라는 인간 자체가 반짝반짝 빛났다. 신은 불공평해. 강해준을 만들 때, 단단히 실수한 거야. 아, 아닌가. 성격이 그렇게 더러운 게 흠이라면 흠이니까. 인간이 웃는 걸 못 봤어요. 그래, 오늘 인터뷰 할 때는 진짜 병아리 눈물만큼 웃긴 하더라. 그 때마다 Lookbook 수습 인턴 얼굴이 붉어지던데? 그래, 자알 생겼지. 너무너무 잘 생겼어. 패션계 아니었어도 얼굴로 먹고 살았을 거야, 그 인간은. 그 얼굴이라면 옥 장판을 팔아도 팔리지 않겠어? 입술을 삐죽이던 백기의 고개가 툭,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안경 너머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이나 싶더니, 이내 감겼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싫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싫은 건 싫은 건데, 멋지긴 한가 보지.”

“욕을 하라고 했더니 칭찬을 하고 앉았어. 이상한 놈.”

피식 웃으며 백기의 볼을 툭, 치는 민의 손길이 말과는 다르게 다정하다. 포크를 쥔 채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든 하얀 얼굴이 민에게는 못내 안쓰러웠다. 전공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세계에 떨어져 덩그러니 발밑만 보고 선 모습이 눈에 선해서. 그러게, 글 계속 쓰지. 왜 그랬어. 아니, 왜 하필이면 편집장 비서로 들어간 거야? 출판사에 지원했는데. 민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준희가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드려 주의를 돌렸다.

“일어나. 가자.”

“계산은?”

“내가 해. 대신 백기 업어라.”

“콜.”

 

**

 

Fascination이 배출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해준이 발굴해낸 신예 디자이너인 진아영의 S/S 컬렉션 패션쇼가 가까워졌다. 모든 사람들의 신경이 부쩍 예민해질 시기였다. 마감 때보다도 더. 동시에 해준이 정말로 눈 코 뜰 새도 없이 바빠지는 때이기도 했다. 작은 실수 하나조차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이 있어, 너나 할 것 없이 히스테릭함이 절정에 달한 사람들 속에서 오로지 백기만이 표류하고 있었다. 난파선처럼.

백기는 해준의 통화가 끝나면 바로 전화를 연결하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듣자 하니 이미 작업이 끝난 쇼의 사운드트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디렉터에게 이 부분을 좀 더 가볍게, 저 부분은 좀 더 몽환적인 느낌으로 바꿀 수 없냐는 내용이었다. 저 사람은 못하는 게 뭘까. 멍하니 고개를 젓는데 해준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텀블러를 들자마자 낮게 혀를 차는 해준을 보던 백기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불렀다.

“편집장님, 패션 드 클래스 전화 있습니다. 2번입니다.”

“텀블러 비었습니다. 샷 추가해서 가져오세요.”

말도 안 돼. 얼마나 됐다고 저걸 다 비워?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됐는데. 경악하면서도 해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튀어 오르듯 일어난 백기가 문을 열어젖히고 뛰었다. 핸드폰과 카드만 챙겨서. 카페에 도착해 샷을 추가한 커피와, 감기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 이나를 위해 따뜻한 유자차를 주문하고 시계를 확인하는 눈길이 초조하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마자 백기는 이를 악물고 또 뛰기 시작했다. 이제 이 정도는 별로 힘이 들지도 않았다. 타이밍 좋게 잡은 엘리베이터에서 숨을 고르고, 사무실로 들어서 텀블러에 커피를 옮기는 백기에게 해준이 말을 던졌다.

“프리뷰 시간 열두시 반으로 앞당기겠습니다. 진아영 디자이너한테 연락 넣고, 각 팀에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백기는 자리로 돌아가다 콜록콜록, 듣기만 해도 괴로워지는 기침을 뱉어내는 중인 이나의 책상 위로 컵을 놓았다. 그녀는 힘겹게 숨을 고르면서 눈짓으로 인사하고는 입을 열었다. 잘 마실게요. 항상 또랑또랑하던 목소리에 비음이 잔뜩 섞였다. 마음 같아선 쉬고 싶지만, 너무 바빠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초짜인 백기를 혼자 두고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뜨거운 유자차를 홀짝이다 걸려온 전화를 받는 이나를 뒤로 한 백기가 가장 먼저 석율에게 전화했다. 메모해둔 프리뷰 스케줄은 오후 두 시 반, 지금 시간은 열한 시 이십이 분.

“프리뷰 시간 열두시 반으로 변경됐습니다.”

- 뭐!?

“저, 그런데 프리뷰가 제가 아는 단어가 맞는 겁니까?”

- 쇼 전에 컬렉션 살펴보면서 평가하는 자리지. 비상이네. 진 디자이너한테는 연락했고?

“아뇨, 지금 할 겁…”

- 먼저 했어야지. 끊어요.

아. 순서가, 틀린 거였나. 아영의 작업실 전화번호를 누르는 손길이 다급하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거였는데, 우선순위 하나도 제대로 못 정해? 정신 안 차리지, 장백기. 백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고 해준의 말을 전달한 뒤 오늘 잡혀 있는 스케줄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오늘 점심은 물 건너간 것 같은데. 가만. 편집장님 오늘 점심 약속이, ……없네. 대신 저녁에 있고, 그럼 드라이 맡긴 옷을 오후에 찾아다 놓고… 할 일을 수정하느라 여념이 없는 백기 옆을 지나치던 해준이 사무실을 나가기 전에 짧게 말했다. 프리뷰에는, ……장백기 씨와 갑니다. 이나 씨는 자리 지키세요. 둘 다 식사 알아서 하시고. 에엣취! 크응. 대답 대신 크게 기침을 해 버린 이나를 바라보는 눈길이 차갑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아픈 사람인데…….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맘속의 말을 해준에게 대놓고 할 정도로, 백기는 간이 크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리뷰는 잘 끝났다.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한 프리뷰였지만. 백기의 눈에는 난해하기만 한 옷들이었는데 해준이 보기에 어떤 옷은 괜찮고, 어떤 옷은 형편없고, 어떤 옷은 대재앙 수준인 듯했다. 다행이라면 컬렉션을 전면 수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고, 불행한 일은 수정해야 할 의상들의 대부분이 대재앙 수준이라 해준의 기분이 매우 저조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아영의 작업실에서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해준은 이번 호의 모델로 선정된 이 연의 화보에 쓸 의상 컬렉션들을 체크하겠다고 선언했다. 단 10분 만에, 해준의 사무실 안으로 행거들이 좌르륵 들어찼다.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아 있던 해준이 일어나자,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늘 여유 있던 석율의 얼굴마저 티가 나게 굳었다. 마치 폭풍전야 같은 느낌에 백기는 숨소리를 죽이고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해준은 행거에 걸린 옷들을 눈으로 훑다가 미간을 좁혔다.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해준의 손길에 족히 열댓 벌은 걸려 있는 행거 하나가 구석으로 밀려났다. 여전히 백기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들이 이어졌다.

“옷 상태들이 다 왜 이렇지? 이게 정말 모델한테 어울리는 옷이라고 생각하고 고른 겁니까? …아직 멀었네. ……이건 좀 괜찮은 것 같은데. 한석율 씨.”

“조금 꾸뛰르 같긴 하지만 화보니까 이런 의상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겠죠.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주면 완벽해질 것 같은데. 자기야?”

“아, 잠시만요, 여기…….”

“빨리빨리 준비 못 합니까.”

“죄송합니다, 너무 어려워서요. 색이 너무 달라서.”

색이 달라? 어딜 봐서? 미묘하게 톤이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색의 벨트를 들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정말로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해준의 표정 역시 너무 진지해서, 백기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비웃으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한숨 섞인 그 웃음에 모두의 시선이 백기에게 쏠렸다. 마지막은,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백기에게도 느껴질 만큼 차가운 해준의 시선이었다. 개미 한 마리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정적 속, 천천히 고개를 든 백기가 말을 꺼내기 전에 해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가 웃깁니까?”

“……아, 닙니다. 그, 제 눈에는, 똑같아 보여서요. 아니, 죄송합니다. 제가 아직 이런 거에 익숙하지 않아서…”

“이런 거?”

“……죄송합니다.”

“‘이런 거’와 본인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군요. 보풀이 잔뜩 일어난 파란색 니트를 입고, 대단한 지성이나 갖춘 양 잘난 척을 하고 있는데. 장백기 씨는 지금 자기가 입은 게 뭔지 압니까? 그건 그냥 ‘파란색’ 이 아니라 정확히 ‘세룰린 블루’입니다. 물론 이것도 모르겠지만, 2002년에는 드 라렌타와 이브 생 로랑 모두 세룰린 컬렉션을 열었죠. 세룰린 블루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백화점에서 명품으로 사랑받다가, 슬프게도 장백기 씨가 애용하는 할인매장에서 시즌을 마감할 때까지 수백만 불의 수익과 그에 상응하는 일자리를 창출했습니다. 패션계가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그 니트를 입고,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거’라고? 웃어? 내가 보기엔 당신이 더 웃긴데.”

만약에 사람의 혀가 무기였다면, 해준은 방금 백기를 죽이고도 남았을 터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은 백기를 보다가 등을 돌리는 해준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싸늘했다. 냉기가 풀풀 풍기는 것 같은 해준의 등을 보며, 백기는 직감했다. 앞으로의 직장 생활이 순탄하기는, 글러먹었다고.

 

**

 

내 차 브레이크 점검 받으세요. 모던 하우스에서 내가 찍어 놓은 테이블 주문하고 집으로 보내세요. 내 아침식사는? 샌드위치 사다 놓으라고 말했을 텐데요, 분명. 피클 빼고 올리브 많이. 계란 추가하고. 란제리 팀에서 사진 찾아오세요. 어제 읽던 신문은 어디다 뒀습니까. 정리 제대로 안 할 겁니까? 마크 제이콥스 매장에서 시계 찾아오세요. 올 때 내 점심으로는 블랙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오늘의 스테이크 갖고 오고.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샘플 가져오세요. 아직 아트 팀 안 갔습니까? 바인더 북 받아와요. 청담동 레나 아틀리에에 화환 보내세요. 꼴렉시옹 프랑세즈 전시회 끝나고 프랑스 대사관 사람들과 식사할 겁니다. 디너 예약하세요. 경치 좋은 레스토랑으로.

악의가 느껴지기까지 하는 해준의 명령에 어떻게든 완벽한 결과를 내놓는 건, 마지막 남은 백기의 오기였다. 저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모아 끌어올린 독기이기도 했다. 이제 칭찬을 듣는 건 포기했지만, 적어도 무능하다고 찍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정말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강해준의 비서라는 커리어가 얼마나 큰 메리트가 되는지, 백기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버텨야 했다.

“장백기 씨. 패션 드 클래스 연결하세요.”

“……안녕하십니까, Fascination 강해준 에디터… 네. 연결했습니다, 편집장님.”

해준이 전화를 받은 걸 확인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백기가 뻑뻑한 눈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난히 일이 많은 하루였다. 절친한 디자이너의 새 브랜드 런칭 기념 패션쇼 겸 파티 스케줄이 잡혀 해준은 오늘 저녁 비행기로 제주도로 넘어가야 했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시간을 맞추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당일 시간대에 맞는 티켓은 이미 매진이었으니. 그래도 내일 하루는 해준이 없으니 그나마 살만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백기는 스스로를 다독이고 안경을 고쳐 썼다. 통화를 끝낸 해준의 모습을 살피던 백기의 시선이 시계를 향했다. 탑승 시간인 일곱 시 오십오 분까지 아직 넉넉하게 남은 여섯 시 삼십사 분. 차는 이미 건물 입구에서 대기 중이니, 해준이 사무실을 나가면 백기와 이나도 퇴근이었다. 때마침 준비가 끝났는지 걸어 나오는 해준을 보며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장 잘 다녀오세요, 편집장님.”

“나 없는 동안 잡음 나지 않게 잘 부탁합니다.”

“…다녀오십쇼.”

백기의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해준은 사무실을 나섰다. 인사도 받아주기 싫다 이건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 했지. 그래. 포기했다. 백기는 이제 습관이 된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챙기고 있는 이나에게 말을 걸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힐끗, 아주 잠시 백기를 본 이나가 짧게 대답했다. 백기 씨도요. 먼저 퇴근할게요. 고개를 까딱이곤 또각또각 굽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이나의 뒷모습을 보던 백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미운털이 박혀도 단단히 박혀버린 것 같은데. 의식적으로 쫙 편 어깨는 자꾸만 움츠러들곤 했다. 지금처럼.

“……퇴근, 하자.”

민이랑 준희나 만나볼까. 불 끈 사무실을 꼼꼼히 둘러본 백기가 가방을 들었다. 오늘따라 가방은 또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괜히 손을 바꿔 들어보기도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백기는 건물 입구를 나서자마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툭, 투둑. 후드득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이었다.

“비?”

……오늘 비 소식이 있었던가? 아닌데. 없었는데. 멍하니 손을 뻗는데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비행기! 해준이 탈 제주도행 비행기가 뜨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백기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설마. 이 정도면 문제없을 거야. 에이, 지나가는 비겠지. 곧 그칠 비. 그럼, 그렇고말고. 우산 어쩌지? 바쁘게 돌아가는 머릿속만큼 눈이 깜박깜박. 일단 가장 가까운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서, 집에 가자.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결론을 낸 백기가 입을 꽉 다물고 빗속을 가로질러 뛰었다.

 

 

세상에, 맙소사. 거짓말이야. 꿈일 거야. 이럴 리가 없어!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국내선을 비롯한 국제선 결항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튼 TV 속 앵커의 옆에 뜬 작은 화면에, 백기는 결국 들고 있던 리모컨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바람이 불어 파도가 높게 이는 곳은, 제주도였다. 아직 옷도 갈아입지 못한 백기의 얼굴 가득 경악이 떠오르는 순간, 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보지 않았는데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귀에 폰을 가져다대기 무섭게 싸늘하게 가라앉은 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백기 씨.

“…네, 편집장님.”

- 지금 당장 티켓 새로 끊으세요.

“편집장님, 지금… 기상 악…”

- 이 정도는 지나가는 소나기에 불과합니다. 찾아서, 끊으세요.

망할 놈의 비. 타이밍도 거지 같이 왜 이럴 때 오고 난리야? 기어코 폰을 침대 위로 집어던지며 짜증을 낸 백기가 급하게 컴퓨터를 켰다. 항공편이 있을 리가 없다. 날씨가 저 지경이라면 헬기를 띄워도 무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백기는 충실히 온갖 사이트를 뒤지며, 실시간 기상청 예보를 확인했다. 결과는 볼 것도 없이 절망적이었다. SNS에는 이미 공항에서 발이 묶인 사람들의 글이 넘쳐났고, 기상은 더 악화됐으면 악화됐지 나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미치겠네, 진짜…….”

전화. 전화. 인터넷에 답이 없다면 직접 부딪치는 수밖에. 하지만 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백기 하나뿐일 리가 없었다. 몇 분을 기다리고 기다려서 간신히 연결된 항공사 고객센터의 직원들은, 지금은 뜰 수 있는 비행기가 없다는 한결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다시 인터넷을 뒤져 보지만, 없던 해답이 갑자기 생길 리 만무했다. 걸려온 해준의 전화에 백기의 눈이 질끈, 감긴다. 후다닥 달려가 폰을 잡아챈 백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해준의 목소리가 꽂혔다.

- 아직 멀었습니까?

“연락 다 해봤습니다. 지금 뜰 수 있는 비행기가 없…”

- 없어? 그럼 헬기라도 띄워. 전세기 가진 블루라인 엔터테인먼트에 연락은 해 봤습니까?

“편집…”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내일 쇼 열리기 전까지 제주도에 나 데려다 놓으라고.

다시 전화가 끊겼다. 백기는 급기야 손톱을 입가로 가져가 아드득 깨물기 시작했다. 공군이라도 움직여서 헬기를 띄우라는 말이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 판국에 전세기를 띄울 미친놈은 또 어디 있냐고. 계속 물어뜯은 엄지손톱 끝이 엉망이다. 젠장. 짧은 욕설을 뱉어낸 입술은 잇새에 깨물려 하얗게 질렸다. 블루라인 연락처가 어떻게 되더라. 저장을 했던가. 제발, 있어라. 있어줘. 있다!

- 네, 블루라인 엔터테인먼트…

“안녕하십니까, Fascination 강해준 에디터 비서 장백기라고 합니다. 죄송한데 전세기 사용 가능합니까?”

진짜 미친놈 취급받아도 할 말이 없겠군. 지끈지끈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백기가 한숨을 쉬었다. 잠들지 못할 것 같은 밤이었다.

 

**

 

이른 아침까지 내리던 비는 오전 열 시가 넘어서야 완전히 그쳤다. 결항한 만큼 증편된 비행기 덕에 해준 역시 제주도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도착해서 이동하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패션쇼에 참석하는 건 무리였지만, 주최 측의 VVIP 명단에 올라있는 해준으로서는 파티에라도 얼굴을 비춰야 했다.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백기는 점심 대신 잠을 선택해 놓고도 오후 내내 약 먹은 병아리처럼 골골거렸다. 어제 저녁부터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사정을 모르는 이나 눈에는 단순히 컨디션이 별로인 것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백기 씨.”

“…….”

“장백기 씨.”

“아, 네?”

“……어제 뭐 했어요, 대체?”

“죄송합니다. 말씀하십쇼.”

“편집장님 돌아오는 비행기 타셨다고 하네요. 백기 씨는 자리 지켜요. 난 오늘 약속 있어서 20분쯤 빨리 나갈 거야.”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좋으니 시간이 빨리 갔으면 하는 마음과, 사무실로 돌아올 해준을 보기가 두려워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마음이 엎치락뒤치락했다. 이나가 나간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아 해준을 기다리면서는 그 마음보다 몸이 더 문제였다.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사무실에서 뛰거나 운동을 할 수는 없었으니. 거기다 어설프게 움직였더니 어디든 머리만 대면 잘 것 같은 상태가 되어 버렸다. 안경 너머의 눈이 풀리다 못해 초점이 없어지고 슬슬 감기며 고개가 멋대로 움직일 때쯤.

“……씨.”

“우, 으…….”

“장백기 씨.”

“……흐아, 읍!”

저를 부르는 해준의 목소리에 기겁하며 일어난 백기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의자가 주르륵 밀려나 벽에 부딪쳐 나는 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백기를 보는 해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백기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어 정신을 차리고 꾸벅, 인사했다. 다녀오셨냐는 인사를 다 마치기도 전에 해준은 등을 돌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가야 하나? 백기의 마음을 읽은 듯, 해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갯짓했다. 혼, 나겠지? 그래도 고생했다는 말 한 마디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백기의 기대는 해준이 입을 열자마자 와르르, 무너졌다.

“내가 왜, 장백기 씨를 뽑았는지 압니까?”

지금까지 나는 스타일 좋고, 날씬하고, 패션을 알며, 시대에 뒤떨어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들만 뽑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어딘가 모르게 멍청하고, 꼭 나를 실망시키더군요. 당신이 면접 때 한 말, 기억합니까? ‘저는 모델처럼 마르지도 않았고, 패션을 잘 알지도 못합니다. 여기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 거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똑똑하고, 일도 빨리 배우는 편이고…’ ……당신의 그 잘난 소신에, 잠시 혹한 겁니다. 일종의 모험이었지. 그래서 희망을 걸었는데, ……그 누구보다, 나를 실망시켰습니다. 이게 장백기 씨가 말하던 ‘똑똑함’입니까?

주먹 쥔 백기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머리 위에서 누군가가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그 떨림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시야가 흐릿했다. 백기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 끝은 공백이었다.

“나가 보세요.”

눈을 깜박이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눈에 핏발이 설 만큼 힘을 준 백기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삐걱삐걱 소리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가방을 챙겨든 백기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마음속에 차오른 말들을 들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그 대상은 석율이 되었다. 그래도 회사 내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이었으니. 백기는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계단을 타고 올라가, 작업실 통유리창 너머 석율의 모습을 보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 재꼈다. 연필로 뭔가 그리고 있던 석율이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 눈물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백기의 눈을 본 그는 무심히 고개를 다시 숙였다.

“……편집장님은, 왜, 저를 싫어하시는 겁니까?”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난 강해준이 아닌데.”

“대체, 제가 뭘 더,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잘 하는 건 무조건 당연한 거고, 못 하면,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몰아붙이고! 절 미워하는 게 아니고서야, 사람이 어떻게…! 참았던 말을 쏟아내다 말고 새삼 치미는 분과 억울함에 말을 잇지 못하는 백기에게 석율은 툭, 말을 던졌다. 그럼 그만둬.

“…뭐라고요?”

“그만두라고. 백기 씨가 그만둬도, 5분이면 그 자리 다시 차.”

“……그런, 게. 아니잖…”

“어차피 다들 하고 싶어서 목매는 자린데 뭐.”

“아니! 저는, 그러니까, 그만두고 싶다는 게 아니라, 그냥… 노력한 만큼, 인정을 받고 싶다는 겁니다. 그뿐이라고요.”

백기의 말에 석율이 연필을 쥔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이 아닌 연필로 백기를 가리키며, 이름을 불렀다. 백기 씨. 움찔, 백기가 몸을 뒤로 살짝 무를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였다.

“노력? 솔직히 말해 봐. 백기 씨가 무슨 노력을 했는데? 강해준 뒤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한 거? 그건 노력이 아니지. 그냥 시킨 걸 한 것뿐이야. 그게 백기 씨 일이고. 정신 차려요, 장백기 씨.”

위로를 바라는 거야? 오구오구, 편집장님이 그랬어? 얼마나 힘들었어, 응? 그 사람이 당신 미워서 그랬겠어? 이런 말들. 꿈 깨. 당신이 간신히 소화하는 업무들의 서너 배를 혼자서 해 내는 사람이 강해준이야. 백기 씨가 보기엔 Fascination이 그냥 그렇고 그런, 허영만 가득 찬 패션 잡지 같지? 천만에. 백기 씨를 제외한 우리한테 이 책은 인생이야. 빛이라고. 우리한테 패션은 삶의 일부거든. 혹은 인생이거나.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디자이너를 꿈꿨어. 저 아래, 울산에서 태어난 꼬맹이가 축구공 대신 잡았던 책이 바로 Fascination이란 말이야. 백기 씨, 글 쓰고 싶다고 그랬지? 여긴 당신한테 거쳐 갈 곳에 불과하다고. 남들은 갖고 싶어서 죽는 시늉도 하는 자리에 앉아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자리라고? 그러면서 강해준 편집장한테는 인정도 받고 싶고? 욕심이 너무 큰 거 아니야?

억울함으로 일그러졌던 백기의 얼굴은 어느 새인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백기와 눈을 마주친 석율이 들고 있던 연필로 백기의 볼을 아프지 않게 찌르며 빙긋 웃었다. 그 웃음에 백기는 쥐구멍이라도 만들어서 숨고 싶어졌다. 징징댄 자신이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진짜 시간이라도 되돌리고 싶은 심정으로 백기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죄송, 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으흠.”

“……. 잘, 하고 싶습니다. 저도. 정말로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잔뜩 풀죽어 바닥만 응시하며 중얼거리는 백기를 보던 석율이, 이번엔 씩 웃었다. 나 봐, 백기 씨. 평소와 같은 석율의 목소리에 슬며시 고개를 든 백기의 시야가 갑자기 블러 처리라도 한 것처럼 변했다. 석율이 안경을 빼 갔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는 백기에게, 석율이 질문을 던졌다.

“렌즈 껴 볼 생각 없어?”

“……예?”

“그, 젤 발라서 넘긴 머리도 좀 정리해서 내리고 다니면 좋겠는데.”

“……네?”

석율은 뜻 모를 소리에 의미 없는 반문만 하는 백기의 손목을 잡고 작업실을 나섰다.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부끄러워할 줄 알며,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석율은 디자이너였고, 사람의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백기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백기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보고 싶어졌으니까.

“어, 어디 가는 건데요. 안경부터 좀…”

다시 한 번, Fascination에 온 걸 환영해. 장백기 씨. 석율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기대감으로 짙어졌다.

 

**

 

아무도 없는 사무실이 꽤 낯설다. 어쩌다 보니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이나가 카드키로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해 보는 일이었다. 백기가 들어오고 나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전부 백기의 몫이었으니. 환기하고 가벼운 청소 정도는 좀 해 줄까. 어제 컨디션도 영 안 좋아 보였었는데.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이며 주인 없는 백기의 책상을 바라보던 이나는 스카프를 풀어 잘 걸어 놓고, 사무실 안의 창문을 다 열었다. 바람이 제법 차지만 햇살은 좋은 걸 보니 비 소식은 없을 것 같다. 기다리던 금요일이다. 마감 때도 아니니 주말 출근은 하지 않아도 된다. 타조 깃털로 만들었다는 먼지떨이를 든 손이 그녀의 기분처럼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벌써 오셨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괜찮, ……”

백기의 목소리에 뒤돌아 본 이나의 입술에서 말의 반절이 나오지 못하고 턱 걸렸다.

“……이나 씨?”

“……. 아. 어. 그래요. 괜찮아.”

“네? 아, 네. 이리 주세요, 제가 할게요. 편집장님 커피 사 오면서 이나 씨 것도 사왔거든요. 책상에 올려놓을 테니까 드세요.”

젤을 발라서 다 넘긴 머리와 안경, 한참 부족한 패션 센스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단정하게 자른 머리에 안경 대신 렌즈를 낀 눈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은 진주색이었다. 완전한 하얀색도 크림색도 아닌, 그 중간에 머무른 색. 옅은 파란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셔츠하며 도트 무늬가 찍힌 인디고 블루의 넥타이, 마지막으로 네이비 색 로퍼까지. 다시 봐도, 어떻게 봐도, 뚫어지게 봐도 백기가 맞는데, 백기의 모습이 아니었다. 늘 그랬듯 바쁘게 움직이는 백기와는 달리, 이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해준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아침부터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지, 블루투스에 한 손을 댄 채 들어온 해준을 보고도 멍하니 있던 이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잠시 이나를 담던 해준의 눈은 자연스럽게 앞을 향했다.

“아니, 그건 그렇게 하면, …….”

말이 끊기고, 걸음이 멈췄다. 이제 막 해야 할 일을 끝낸 백기가 급히 책상 옆에서 떨어져 섰다. 해준의 시선이 백기를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시선을 받고 있는 당사자가 깨닫지도 못할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 해준의 통화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인사만 한 백기는 렌즈가 영 적응이 되지 않는지 힘주어 눈을 깜박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통화를 끝내고 텀블러를 든 해준의 시선 끝은 신문이 아니라, 통유리창 너머의 백기였다.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가 이내 백기에게서 떨어졌다.

패션을 전혀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백기를 하루 만에 바꿔놓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석율의 작품이다. 필드에 들어와 석율과 함께한 시간만 10년이니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왜, 지금.”

그것도 하필이면 석율의 손을 거쳐서. 달라진 백기의 모습이 거슬렸다. 분명 Fascination에 어울리는 모습이고, 애초부터 저렇게 하고 다녔어야 맞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문제는 그 이유가, 안 보인다는 거였다. 왜 거슬리는 거지? 저도 모르게 굳어진 표정 때문에 스케줄을 확인하려던 이나가 해준의 사무실 앞에서 발이 묶인 것도 모른 채, 해준이 생각에 잠겼다.

 

 

“네, Fascination 강해준 에디터 사무실입니다. …아뇨, 편집장님 지금 자리 비우셨습니다. 네. 메모 남겨드릴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백기는 전화를 끊고 습관적으로 오른손을 눈 사이로 갖다 대다 헛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째더라? 일곱 번까지는 센 것 같은데. 가볍게 고개를 젓고 쓰던 이메일을 마저 쓰면서는 평소보다 뻑뻑한 눈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거치적거리는 게 없으니 좋긴 한데…….

“……언제쯤 적응되려나.”

해준이 이나와 함께 자리를 비워, 혼자 남은 사무실 안. 퇴근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잠 때문에 일어난 백기가, 통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인사할 뻔하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나보고 인사하려고 한 거지? 아, 세상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누구한테 들켰으면 한 달 놀림감이야, 이거. 고개를 저으며 이리저리 움직이다 해준의 책상을 정리하는데 주머니 안의 폰이 우웅, 울렸다. 민과 준희가 보낸 메시지였다.

[오늘 칼퇴?]

[못해도 와. 오늘 보너스 받았으니까 내가 쏜다.]

우와. 하얀 얼굴 가득 미소가 피어오른 순간,

“……뭐 합니까?”

귀신같이 들려오는 해준의 목소리에 백기가 후다닥 폰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니, 왜 꼭 이런 타이밍에… 웃음기는 온데간데없이, 날아올 독설에 대비해 잔뜩 경직된 백기의 얼굴을 보던 해준은 말없이 백기를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어어, 안… 혼나나? 해준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쁜 까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예? 아, 아니요. 아닙니다.”

“나가 보세요.”

살았다. 눈에 띄게 안도하며 재빨리 멀어지는 백기를 보던 해준이 또 미간을 좁혔다. 생각하는 걸 고스란히 얼굴로 드러내는 사람은 질색이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그런데 방금 백기를 보면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던가. 아무래도 이번 주에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장백기가,

“편집장님, 대표님 전화입니다.”

…귀여워 보일 리가 없었다.

 

**

 

꽃샘추위와 비가 지나가고 나니, 완연한 봄이었다. 회사 앞 도로의 벚꽃나무가 그야말로 장관이다. 출근하는 사람들은 바쁘게 걸음을 옮기다가도 흐드러지게 핀 벚꽃에 시선을 빼앗겼다. 백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건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바짝 긴장해야 하는 백기였기에, 출근 전의 여유는 소소한 행복이었다. 살랑,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이 고개를 젖힌 백기의 볼을 간질였다. 아, 날씨 좋다. 꽃놀이 안 가도 출근할 때마다 비슷한 기분이 드는 건 좋은 거겠지? 좋은 거라고 생각하자.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길 수 있게 해주세요. 그래도 요즘은 큰 사고를 친 적도 없고, 지적 받는 횟수도 줄었으니까. 패션은 여전히 어려웠지만, 적어도 자신이 몸담은 이곳이 더는 ‘이상한 나라’로 느껴지지 않았다. 백기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감돌았다. 이제 가 볼까. 하늘하늘 날리는 벚꽃 잎을 보다 고개를 돌리는데, 볼을 찌르는 손가락. 석율이다.

“좋은 아침, 백기 씨~”

“……앱니까?”

“누구 씨가 너무 기분이 좋아 보여서 말이야. 나도 모르게 그만.”

“그만 찌르고 이거나 들어요. 석율 씨 커피.”

“내 것도 있어?”

땡큐. 윙크한 석율이 센스 있게 커피 캐리어 째로 들었다. 백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백기와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해준의 사무실까지 들어온 석율은, 백기가 할 일을 다 끝낼 때까지 왜인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한석율씨, 일 안 합니까? 없어요? 한가해? 백기의 말에도 빙글빙글 웃으면서 자리를 지키더니, 해준이 들어오자마자 성큼성큼 뒤따라갔다. 뭐야. 편집장님한테 볼일이 있었던 거구나. 백기는 어깨를 으쓱하곤 제 몫으로 산 음료 위에 소복이 쌓인 휘핑크림을 베어 물었다. 아, 달다. 맛있어.

“자선 파티 오늘인 거 아시죠?”

“그거 말하려고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었던 겁니까?”

“아침부터 왜 이렇게 날카로우실까. 옷은 오후에 보내 놓을 겁니다. 톰 포드, 더블, 핀 스트라이프, 가볍게 보타이, 구두는 에르메스.”

“좋네. 더 할 말은.”

자선 파티? ……스케줄에는 없는 일정인데. 해준과 석율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백기를 본 이나가 말을 꺼냈다. 백기 씨 들어오기 전부터 잡힌 일정이에요. 스타일하고 K신문사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자선파티. 취지가 좋죠. 미혼모를 위한 파티거든. 파티 수익금은 전부 기부하고. 어차피 퇴근 이후에 있는 스케줄이니까 백기 씨하고는 상관없을 거예요. 물론, 난 가지만. 이나의 말을 들으며 백기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뱃속으로 사라진 휘핑크림이 아쉬워 빨대 끝을 쪽 빨고 대단하네요, 라는 말을 하는 백기의 얼굴이 천진하다. 딴에는 심술을 부린다고 부린 건데, 그 대상이 그걸 깨닫지 못하면 당사자가 민망해진다. 지금 이나가 그랬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백기는 눈을 반짝이며 이나를 향해 질문했다.

“유명한 사람들 되게 많이 오겠네요? 신문사면… 저널리스트나, 작가나, 기자…”

“그, 그렇죠. 거기다 초대되는 사람들은 전부 이름만 대면 알 사람들이니까.”

“우와…….”

좋겠다. 감탄사 뒤에 따라붙은 말이 순수하기 그지없어서, 이나의 말문이 막혔다. 때마침 나온 석율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인사하지 않았다면, 타이밍 좋게 전화가 울리지 않았다면 아마 백기의 페이스에 말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도리도리 고개를 흔든 이나가 해준의 스케줄을 체크하러 들어갔다.

 

 

톡. 톡. 톡. …톡. 해준이 손가락으로 책상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아까부터 끊이질 않았다. 점심을 먹으며 석율과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 한 구석에서 떠날 생각을 않는 탓이었다.

- 맞다. 우리 팀에 오늘 일 있는 사람이 있더라고.

- 근데.

- 머릿수는 맞춰야지 않겠어? 비서는 두 사람이고.

- 장백기 씨를 데려가라?

- 다른 팀에서 데려가도 상관이야 없겠지만. 백기 씨도 슬슬 경험을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 …….

아직도 장백기가 강해준한테 골칫덩이야? 마지막 질문에 자신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피했다는 게 맞는 표현인지도 몰랐다. 어찌됐든 파티는 몇 시간 후고,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는 걸 해준은 알고 있었다.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쉰 해준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 다 들어오세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어난 이나와 백기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해준은 다리를 꼰 채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에 열리는 자선 파티에, 장백기 씨도 동석합니다.

“……예?”

“두 번 말하게 만들 겁니까.”

“아니, 아닙니다.”

“자선 파티 참석자 명단 빠짐없이 외우고. 이상입니다. 나가 보세요.”

어딘가 모르게 못마땅한 기색인 이나를 보면서도 백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공황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니, 왜? 내가? 파티에? 얼떨떨한 백기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쉰 이나가 B4 용지 크기의 스프링 북을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자선 파티 참석자 명단이에요.”

“……이, 한 권이요?”

“아니. 한 권 더 있죠.”

“두…… 권이요.”

“난 이미 다 외웠으니까, 백기 씨만 외우면 돼요.”

쉽죠? 똑똑하잖아. 힘내요. 말을 맺고 상큼하게 웃는 이나에게 백기가 어색한 미소로 화답했다. 이 두께를, 일하면서, 저녁 일곱 시까지 다 외워? 그게 되는 일인가? 나, 큰일 난 거 아닐까. 어떻게든, 해야 했다.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무엇보다 해준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백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프링 북을 넘겼다. 시간은 세 시 이십사 분을 막 넘어가고 있었다.

 

 

파티는 별천지 같았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연상케 하는 레드카펫 하며, 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화려한 샹들리에에 백기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몇 주를 기다려서 겨우 받은 드레스를 입은 이나가 한껏 웃으며 백기의 옆구리를 꼬집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얼이 빠져 있을지도 몰랐다. 소리를 겨우 삼키며 앞을 보는 백기의 볼이 블러셔를 칠한 것 마냥 발그레했다. 아, 진짜, 촌스럽긴. 그런 백기를 보며 중얼거리는 이나의 얼굴도 상기된 건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같은 사람은 해준이었다. 위화감 없이 파티에 녹아들었으면서 그 존재감만큼은 빛나는 사람. 번쩍번쩍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가 눈이 부실 만도 한데 해준은 눈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거기다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의 직책이나 이름을 일일이 불러주는 모습은 백기가 봐도 멋있었다. 분명 기억하지 못할 걸 대비해서 명단을 외우게 한 거겠지? 쓸데없는 노동을 한 게 아닐까. 내가 나설 것까지도 없어 보이는데…….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도 계속 웃느라 얼굴에 경련이 올 지경이었다. 한 시간 정도는 편집장님 뒤에 붙어서 같이 다녀야 된다고 그랬던가. 그 뒤에는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잠시 쉴 수도 있을 거야. 그나저나 진짜 유명한 사람들 많다. 해준이 이야기를 나누는 틈을 타 슬쩍 눈길을 돌린 백기의 시야에 낯선 얼굴들이 보였다. 오, 다들 잘생겼어. 키도 커. ……근데 누구지? 모델인가? 명단에 없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어디서 보긴 한 것 같은데, 책에는… 없었는데.

“이나 씨.”

“응?”

“저기, 음.”

“……. 누구지?”

“명단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묘하게 낯이 익단 말이야, 어디서 봤는데. 워킹 하는 것도 봤었는데. 어디였지, 어디였더라. 그들이 점점 해준에게 가까워질수록 이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백기는 입을 꽉 다물고 기억을 더듬었다. 자료 찾다가 본 얼굴들인데. 해준이 살짝 고개를 돌린 순간, 백기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알겠다!

“케이블 J tv 밀라노 프로젝트 출연자들입니다.”

올해의 색인 로즈쿼츠와 세레니티를 테마로 만든 수트를 입고 있었다. 어느새 해준의 바로 앞으로 다가온 사람들을 보며 백기는 한 걸음 물러나 표정을 관리했다. 이나가 손을 뻗어 백기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고마워요. 입모양을 읽은 백기가 눈을 접어 웃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했어. 방금 나 좀 멋있었던 것 같아. 뒤로 감춰진 백기의 손이 꽉, 움츠러들었다. 파이팅을 외칠 때처럼.

 

 

한창 무르익은 파티는 어느새 애장품 경매 시간에 접어들었다. 멍하니 사람들을 보던 백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멍하지? 아까부터 시선이 고정되질 않았다. 테이블에 있던 레몬 물을 한 잔 마신 것뿐인데, 이상하게 더웠다. 열이 훅훅 오르는 게 심상치가 않아서, 백기는 최대한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요리조리 피해서 발코니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나른했다.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기분이 붕 떠서 어떡하지. 늦잠이라도 자면 큰일 나는데. 또 혼나는 건 싫어. 난간을 팔로 짚고 기댄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백기가 울상을 지으며 등을 대고 쭈그려 앉았다. 집에 갈까. 살짝 빠져나가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어차피 내 할 일은 여기까지일 텐데.

“……장백기 씨? 여기서 뭐 합니까.”

“……어, 편집장, 님.”

머리 위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백기가 고개를 들며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는 게 맞겠다. 다리가 풀려 도로 주저앉았지만. 어어? 하얀 얼굴 가득 당황이 떠올랐다. 해준은 백기를 내려다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뭐 마셨습니까.”

“네에?”

“테이블에 있던 것 중에, 뭐 마신 거 없어요?”

“아, 어… 레몬 물, 이요.”

“……. 진 토닉이겠지.”

어떻게 하면 진 토닉을 레몬 물로 생각하고 마실 수가 있는 거지?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여전히 멍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준이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 한 번에 백기의 어깨가 축 처졌다. 아니, 내가 레몬 물 한 잔 마셨다고 지금 이렇게 한심한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거야? 대체 얼마나 미움 받고 있는 걸까, 나. 눈에 띄게 풀이 죽은 얼굴을 보고 당황한 쪽은 이제 해준이었다.

“……일단, 일어나요.”

취한 사람을 데리고 계속 있을 수는 없다. 해준이 뻗은 손을 응시하던 백기가 두 손으로 해준의 손을 꼭 잡고, 당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인데다 백기가 준 힘이 꽤 센 탓에, 해준은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눈높이가 백기와 같아졌다. 놓으려고 해도 오히려 더 힘을 주는 백기 때문에 결국 손을 빼내는 걸 포기한 해준이 백기와 눈을 맞췄다.

“……편집장님은 왜, 제가 싫으십니까?”

“…….”

“…제가, 그렇게… 미우십니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제 눈을 바라보는 백기의 눈은 술기운이 묻어 있긴 했지만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대답 없는 해준을 보며 백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느릿느릿 이어지는 말들은 서툴렀지만 전부 마음이 담긴 말들이었다.

“잘, 하고 싶어요. 진짜로……. 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래도, 아직 부족한 거… 저도, 알아요. 아는데요… 쪼오끔만, 저 예뻐해 주시면, 안 됩니까…?”

“……장백기 씨.”

“잘, 할게요, 제가. 다아, 열심히.”

그러니까아, 저, 저요, 성 떼고, 백기 씨, 라고… 불러주시면, 안 돼요? 저도 듣고 싶, 은데.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해준의 손을 잡은 백기의 말끝에 울음이 번졌다.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해준이 빈손으로 백기의 머리를 쓰다듬은 건.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눈이 커다래졌다. 어, 지금, 어? 달싹이는 입술 사이에서는 말도 숨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편집장님 손이, 내 머리…….

“……이제 일어나요.”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백기를 이끌고, 해준이 호텔을 나섰다. 아, 저, 저기, 편집장님, 저… 해준의 손에 이끌려 택시 앞에 선 백기가 뭔가 말하려는 듯 자꾸만 저를 보는 걸 가볍게 무시한 해준이 백기를 택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을 닫기 직전, 둘의 시선이 얽혔다.

“백기 씨.”

“……!”

“내일 봅시다.”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진 백기의 눈에 해준의 미소가 비쳤다.

 

**

 

귀를 두드리는 알람소리가 머리도 때리는 것 같다. 끄응, 끄응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베개에 고개를 묻은 채 다리만 꼼지락거리던 백기가 크게 숨을 내쉬며 힘겹게 눈을 떴다. 아으, 머리야……. 백기는 산발이 된 머리를 손으로 헤집으며 침대 위를 뒹굴다가 낑낑거리며 일어났다. 손을 더듬어 한 손으로는 안경을,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쥐면서도 여전히 눈은 뜨지 못한 채였다. 몇 시지. 눈을 부비며 가장 먼저 시간을 확인한 백기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어째서 앞자리가 8이지? 왜? 순간 사고가 정지하고, 시간이 멈췄다. 망했다.

“망했어!!!”

어쩌지, 어떡하지? 어떡해? 나 죽었다, 진짜 죽었어! 폰을 내팽개치고 안경을 쓰자마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칫솔을 물고 나온 백기가 벗어놓은 옷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파티에 입고 갔던 옷을 입고 출근을 할 수는 없었다. 칫솔질을 하다 말고 옷장을 여니 보이는 건, 어느새 많아진 옷. 색깔도 무늬도 다른 셔츠와 바지를 빠르게 훑은 후에 대강 골라서 던져두고 마저 씻고 나니 시계의 분침은 3과 4의 중간이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지각은 한 적 없는데. 백기는 후다닥 옷을 챙겨 입고 옷매무시할 겨를도 없이 집을 나섰다. 침대 위의 핸드폰을 까맣게 잊고.

다행히 택시는 빨리 잡혔지만, 도시의 출근길은 붐빈다. 당연했다. 이대로라면 해준의 커피는 물론이고 신문을 들고 가는 것조차 무리였다.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보던 백기가 문득 핸드폰의 부재를 깨닫고 주머니와 가방을 뒤졌다. 나 진짜 왜 이러냐. 한숨을 푹 쉬고는 반쯤 포기한 상태로 렌즈 케이스를 꺼내는 손에 힘이 하나도 없다. 어쩔 거야. 솔직하게 얘기하고 왕창 깨져야지. 근데 대체 나 어제 뭘 마시고 뻗은 거지? 마신 거라곤……. 천천히 기억을 더듬던 백기가 멈칫, 하며 눈을 치떴다. 어. 라. 어라? ……어?

- 잘, 할게요, 제가. 다아, 열심히.

…….

- 성 떼고, 백기 씨, 라고… 불러주시면, 안 돼요? 저도 듣고 싶, 은데.

설마 나야? 에이, 꿈이겠지. 하, 하하, 하하하, ……하. 나잖아. 장백기. 백기야. 나야. 대체 어제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그랬어? 드디어 미쳤구나, 응? 얼굴을 가리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또 멈칫. 기억의 끝자락에 선명하게 남은 목소리, 눈, 미소. ……강해준.

- 백기 씨. ……내일 봅시다.

“……아.”

순식간에 얼굴과 귀가 화르르 달아올랐다. 어떡해. 어쩌지. 아. 죽을 것 같다.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무서워. 뭐가 이렇게 좋은지 모를 만큼 좋아. 성 떼고 이름 불러준 것도 좋고, 내일, 보자고…….

“아으으으…”

……근데 내일 보자고 하자마자 나는 늦었을 뿐이고. 시간을 멈추고 싶다, 진짜. 찔끔 나오려는 눈물을 겨우 삼킨 백기가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계의 분침 끝이 정확히 9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 ……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늦은 건 아니었다. 아홉시 전에는 도착을 했으니. 헐레벌떡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사과하던 백기의 말끝이 흐려졌다. 해준의 책상 위에 놓인 텀블러, 신문들. 깔끔하게 정리된 사무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데, 또각또각 하는 굽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새침한 표정의 이나가 보였다.

“핸드폰 놓고 나왔어요?”

“네? 아, 예. 예.”

“어쩐지, 전화를 안 받더라. 편집장님은 대표님하고 얘기하고 계실 거예요. 뭐해? 앉아요. 일할 준비 안 해?”

“……감사합니다.”

당연하지. 이나의 대답에 백기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고마워요, 이나 씨. 제가 오후에 커피 살게요. 거듭되는 백기의 인사에 오히려 이나가 더 민망해져 손을 내저었다. 아, 됐어요. 뭐 이런 걸로 자꾸 호들갑이야. 이나 씨가 저 살려주셨는데 당연하죠. 가벼운 대화를 하던 둘은 복도 끝에 보이는 해준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기 씨.”

“네?”

“……잘, 해 봐요. 우리.”

내 자리 넘볼 생각은 말고, 공부는 열심히 하고. 알았어요? 백기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해준이 들어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늘 하는 인사에도 왜인지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백기가 환하게 웃었다. 하얀 얼굴 가득 피어오른 미소가 해준의 시선에 걸렸다. 해준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올라갔다가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백기 씨.”

“네?”

“……집중하세요.”

“…넵.”

해준의 부름에 눈을 빛내며 대답한 백기가, 이어진 말에 금방 가라앉아 조용히 대답했다. 꼬리라도 있었다면 붕붕 흔들었을 기세는 어디 가고, 얌전해져서 저를 바라보지도 못하는 백기를 응시하던 해준이 조용히 웃었다. 귀엽네, 진짜.

- 쪼오끔만, 저 예뻐해 주시면, 안 됩니까…?

불쑥 찾아들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사람이 생겼다. 책상 앞에 앉을 때까지 제 등을 찌르는 시선의 주인이 어디까지 귀여워질지, 해준은 매우 궁금해졌다.

 

 

And that's all?

 

 

 

 

 

 

그리고 아직 먼 이야기.

 

 

“……편집장님? 그, 거… 뭡니, 까.”

“보면 모릅니까. 립스틱입니다. 아, 안경 안 써서 안 보입니까?”

“……그러니까 그걸 왜 들고 계시는 건데요?”

“이리 와 봐.”

아, 또다. 쿵. 해준이 예고 없이 말을 놓을 때마다 백기는 꼭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그것도 가속도가 붙어서 한 바퀴 도는 중인 롤러코스터 가장 뒷자리에 앉아 있는 느낌. 아무래도 평생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까. 정신을 차리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백기의 속눈썹에 톡, 물방울이 떨어져 매달렸다. 눈물처럼. 흐릿한 시야에 미간을 좁히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백기의 허리를 해준이 한 팔로 감아 당겼다. 엄, 마…! 저도 모르게 새된 소리를 올리고는 새빨개지는 하얀 얼굴이 사랑스러워, 해준은 작게 소리 내서 웃음을 터뜨렸다.

“놔, 놔 주십…쇼.”

“싫은데.”

“아, 진짜!”

“진짜, 뭐.”

“……부, 불편합니다, 자세. 이상, 하단… 말입니다.”

앉으면 되잖아. 내 다리 위에. 해준의 짧은 말에 이젠 귀와 목덜미까지 붉게 물든 백기가 어쩔 줄 모르다, 결국은 해준의 허벅지 위로 자리했다. 젖은 머리칼 끝에 대롱대롱 맺힌 물을, 긴 손가락이 거둬간다. 이 정도로 가까이 있으면 해준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리가 없고, 해준이 들고 있는 립스틱을 모를 수가 없다. 갈 곳 잃은 손은 흐트러진 가운 위로 얌전히 놓였다. 숨소리도 닿을 만큼 해준과의 거리가 가깝다.

“해도 됩니까?”

“네!?”

“뭘 상상하고 그렇게 놀라는 거야. 발색 테스트.”

“제, 제가 뭘 상상, 상상했다고 그러십니까?”

“말은 왜 더듬어.”

“안 더듬었습니다! 그리고 저 방금, 씻었는데요.”

악마. 이 악마! 애인 집 침실에, 그것도 침대에, 둘이서 이런 자세로 있는데, 해도 되냐고 물으면 당연히 그렇고 그런 상상을 하게 되는 거 아니냐고. 이 나쁜…… 강해준 같으니라고. 그럼 애초부터 발색 테스트라는 목적어를 넣어서 물어보면 될 일이잖아. 왜 나만 이상한 사람 만들고 그래? 진짜 이상해! 속으로 난리가 난 백기가 눈에 훤하게 보여 또 웃을 뻔했지만, 해준은 짐짓 태연히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씻었으면. 발색 테스트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편집장님이 하셔도, 되지 않…”

“이름.”

“…해, ……해준, 씨가, 직접 하셔도 되는… 거잖습니까.”

“나한테 안 받는 색이야. 지방시 코랄 계열이거든.”

입술 벌려요. 해준이 이렇게 나올 때는, 남의 의견은 아무래도 좋으니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야 말 것이라는 의지가 가득하다는 소리였다. ……립스틱 바를 때 느낌 정말 이상한데. 백기는 두 말 없이 달싹이던 입술을 살짝 벌렸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 위로 해준이 색을 입혔다. 립스틱 뚜껑을 닫아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 두고, 해준은 한동안 말없이 백기를 응시했다. 정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쪽은 백기였다.

“…이상, 해요?”

“…….”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이상해.”

“그럼 지워 주십…”

“내가. 이상하다고. 이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취미… 요?”

무슨 취미 말씀하시는 건데요. 라는 말은 나오지 못했다. 해준이 백기의 입술을 집어삼킨 탓에. 숨을 쉬는 것도 잊을 만큼 놀란 백기를 달래듯, 해준은 손을 뻗어 백기의 뒷목을 살살 쓸었다. 잔뜩 굳어 있던 몸이 천천히 풀릴 때쯤 백기의 입술 사이로 혀가 미끄러져 들어갔다. 눈을 감고 있는 해준에게도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느껴졌다. 해준은 여태 가운 자락을 찢을 기세로 꽈악 쥐고 있는 백기의 손을 찾아 잡았다. 손가락들이 살며시 얽히는 동시에 해준의 혀가 백기의 혀를 톡, 건드렸다. 자연스럽게 백기의 손가락이 해준의 손가락 사이로 단단히 자리 잡았다. 그게 기폭제라도 된 듯, 숨이 커졌다. 입맞춤도 깊어졌다. 도망 다니던 백기의 혀를 잡아채 아프지 않게 깨물던 해준이 이내 젖은 소리가 나게 빨아들이고, 다시 깨물고, 놓아주나 싶더니 아랫입술을 혀로 끈질기게 핥았다. 머리가 팽팽 도는 것 같은 상태인 백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준의 손을 잡는 게 전부였다.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달려들더니 이젠 애태우는 건지 뭔지, 느릿하게 입술을 맛보는 애인에게 백기는 제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이렇게 닿아 있는데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깨닫지도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쿵쾅쿵쾅 고동소리만 울리던 백기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립스틱 바른 애인한테 키스하는 취미. 생긴 것 같아, 방금.”

“흐으, 간지럽, 습니다. 입술 대고 얘기하지 마세요.”

“싫은데.”

“악취미.”

“악마라면서. 그럼 악마답게 굴어줘야지.”

순식간에 자세가 뒤집혔다. 해준은 눈을 깜박이는 백기를 내려다보다 쪽, 짧게 입을 맞췄다. 숨과 함께 웃음이 터졌다. 좋아? 또 하면, 또 웃을 겁니까. 다정한 말에 이번엔 백기가 고개를 들고 해준의 입술을 찾았다. 조금은 길게. 가만히 입술을 맞물린 채로, 해준이 백기의 볼을 매만졌다. 힘든 하루였다. 자신만큼 백기도 그랬을 터였다.

“……입술에서 립스틱 맛. 납니다.”

“장백기 입술에 바른 거 내가 다 먹었으니까.”

“그러게 누가 발색 테스트하는데 키스하라고…”

“그걸 믿었습니까?”

“네?”

“그냥 바르고 싶어서 바른 거고, 하고 싶어서 한 건데.”

“……네?”

“사진 찍어두고 싶네. 지금 너, 얼굴. 엄청 야하거든.”

립스틱 다 번져서 엉망인데, 죽여줍니다. 절경이네요. 해준의 말을 듣다가 멍해진 백기의 넋이 돌아오기 전에 해준이 다시 한 번 입술을 겹쳤다. 내일, 아니 오늘은 주말이다. 즉, 일이 없는 날. 그러니 늦잠을 자도 괜찮은 날. 따라서 지금 당장 백기를 재울 마음이, 해준에게는 없었다.

“하아……. 이거, 지워야…”

“졸립니까.”

“……누구 때문에 잠 다 깼습니다. 놀라서.”

“내가 지워줄게.”

“…해준씨.”

“같이 늦잠 잡시다.”

지금 자기 싫어서 그래. 아쉬워서. 흡사 투정 같은 해준의 말 덕분에 백기가 눈을 접어 웃었다. 알았습니다. 근데 저 졸리면 잘 건데요.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유쾌했다. 해준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숙여 백기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수 있으면 자 보든가.

아, 간지러워요.

그러라고 하는 건데.

……해준씨.

네.

…오늘 하루도, 고생하셨습니다. 많이.

연인들의 주말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by R_i_a_n 2016. 4. 7. 17:09

* 돌이킬 수 없는 02


“흐으… 으…!”


살얼음판 위를, 한 번도 신어보지 않은 스케이트를 신고 걷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걸까. 마음껏 지치고 나가기에는 얼음이 단단하지 않을뿐더러 스케이트도 익숙하지 않다. 금방이라도 깨져서 물속으로 잠겨 버릴 것만 같은, 그런 감각. 서로의 맨살을 맞대고 키스를 주고받으며 뇌가 녹아버리는 착각이 일 정도의 쾌락을 느끼면서도 어느 순간 다가온 그 느낌이 목을 조른다. 꿈에서도 예외는 없다. 석율과 몸을 섞은 날 밤이면 더더욱 그랬다. 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깬 백기가 거친 숨을 애써 삼켰다. 주위는 어둡다. 해가 뜨기까지는 아직 멀었다.


“…왜 또 깼어.”


흠칫. 가라앉은 석율의 목소리가 백기의 귓가에 감겨든 순간 몸이 반응했다. 질끈 눈을 감았다 뜬 백기가, 제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는 석율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종종 이렇게 새벽마다 깨는 덕에 석율은 백기와 함께 자는 날이면 깊은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가끔 깨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석율이 안고 한참을 괜찮다 속삭여야 다시 잠들고는 했다. 딱 한 번, 잠들었다가 깨지 말라고 좀 심하게 다룬 적이 있었다. 물론 결과는 성공이었으나, 다음 날 해준에게 호되게 혼이 나는 걸 보고 그 방법은 포기한 석율이었다.


“미안. 나 때문에 깬 겁니까…?”
“괜찮아요. …고개 좀 들어보지, 백기 씨.”


굿나잇 키스 해줄 테니까, 빨리 자. 머뭇거리다 고개를 든 백기의 이마, 눈, 코, 입술에 차례대로 입술을 찍은 석율이 졸린 눈으로 웃음을 지었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석율의 미소와 닿아 오는 따뜻한 체온에 백기가 다시 눈을 감았다. 울컥 하고 눈물이 나오려 하는 걸 간신히 참았다. 비겁한 새끼. 저 자신에게 욕을 하며, 석율의 품에 파고든다. 규칙적인 심장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백기가 천천히 잠이 들었다.


…잠든 모양이네. 새근새근 들려오는 숨소리에 석율이 그제야 몸에 힘을 뺀다. 출근하려면 자신도 얼른 자야 하는데, 입가에 살짝 배인 미소가 점점 진해진다. 백기 안에서 어떤 갈등이 있는지 안 봐도 훤했다. 관계를 지속하면서도 석율의 감정에 답을 하지 못하는 죄책감과, 석율과 몸을 맞대면 맞댈수록 더 커져가는 해준에 대한 감정이 소용돌이를 치고 있으리라. 몸부림을 치며 괴로워하면서도 저를 거부할 줄 모르고, 제 아래에서 예쁘게 우는 백기가 귀엽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휩쓸리는 백기는 순간순간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 같겠지만, 석율은 달랐다. 이 시간이 하루라도 더 길어야 했다. 그래야 백기가 온전히 자신의 품에 추락할 수 있으니.


결벽증이 있는 강해준이, 과연 다른 남자를 알아 버린 장백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른 석율이, 곤히 잠든 백기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아닐 거다. 혹여나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불쑥불쑥 내가 길들여 놓은 장백기의 모습이 보이겠지. 처음부터 다시 물들이려 해도 생각처럼 잘 안 될 거고. ‘처음’ 이, 그래서 무서운 겁니다. 강해준 대리님. 가져갈 수 있으면, 빼앗아갈 수 있으면 어디 해 보시죠. 백기의 어깨에 이를 세우며 석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요즘 백기 씨 분위기 변한 것 같지 않아?
- 너도 느꼈어?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연애하나?


그걸 모르면 이상한 거다. 바로 곁에서 일하고 있는 해준이 보기에도 그 변화가 너무 확실해서, 탕비실에서 여직원들의 대화를 듣고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연애를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석율이 오며가며 사무실에 들러 말을 걸 때마다 자꾸 제 눈치를 보는 걸 보면. 무엇보다, 지금 백기의 상태는 연애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장백기 씨.”
“…….”


세 시 안으로 달라고 했던 보고서를, 기억은 하고 있는 걸까.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지만 정작 그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해준이 다시 백기를 불렀다. 장백기 씨. 안 들립니까.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백기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해준의 앞에 섰다. ……아무리 봐도 연애하는 사람의 얼굴은 아니다.


“……따라와요.”


사무실 안에서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 일부러 옥상을 택했다. 벌 받는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제 앞에 선 백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해준이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소리에 백기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장백기 씨. 회사에 일 하러 온 거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회사에 사적인 일 끌어들이지 마세요. 그렇게 티내고 다니는데 모를 것 같습니까. 굉장히, 거슬립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말이 날카롭다. 새파랗게 날이 선 말들이 백기를 할퀴고 있다는 걸 알지만, 이미 해 버린 말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조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면 지금, 위로라도 받고 싶은 겁니까?”
“…….”
“이렇게 흐트러질 정도로 힘드니까 좀 알아 달라고 투정 부리는 거냐는 말입니다.”
“아닙, 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이럴 거면 차라리 나가는 게 어떻습니까.”


더 이상 실망하게 만들지 말고. 백기가 부정을 하든 말든 할 말을 끝낸 해준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쿵, 하고 옥상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힌다. ……젠장. 기어코 해준의 입술 사이로 욕이 새었다. 말이 심했다. 필요 이상으로 감정적이 되어 버린 탓에, 혀끝에 독이라도 묻은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문득 태우지도 않던 담배가 절실해질 정도로, 백기가 마음에 걸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이유도 모른 채 해준은 마음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갔다.



- 이럴 거면 차라리 나가는 게 어떻습니까.


옥상 문이 닫히자마자 백기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해준의 말을 들으면서 내내 참았던 눈물이 왈칵, 소리 없이 터져 나오는 것이리라. 옥상 구석에서 불도 붙이지 못한 담배를 이로 물어뜯다시피 하던 석율이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웅크려 앉아 애처롭게 울고 있는 백기의 머리 위로, 정장 마이를 덮어준다. 석율은 놀라서 고개를 들려 하는 백기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그를 품에 안았다. 쉬이. 괜찮아. 나야 나. 착하지. …괜찮아. 귓가에 익숙한 석율의 목소리가 들리자, 백기의 몸이 잠시 굳었다. 윽, 끄으… 흑, 흐으… 으, 기어코 터지는 서러운 흐느낌에 석율이 입술을 깨물었다. 등을 토닥이는 손이 떨린다.


곁에 있어도, 다른 사람이 준 상처로 만신창이가 되어 피를 철철 흘린다. 내가 주고 있는 상처만으로도 충분히 힘들 텐데. 그렇다고 내가 너를 놓아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내가 널, 어쩌면 좋을까. 내 아래에서만, 내 팔 안에서만 울었으면 좋겠는데. 석율의 눈이 아득히, 저 깊은 곳처럼 까매진다.


아니다. 강해준은 세상에서 제일 쉽게, 그리고 잔인하게 널 아프게 하는 유일한 사람에 그쳐야 한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네가 유일하게 기댈 단 한 사람이어야 해서. 그러니까 울어라. 눈물이 다 마를 때까지라도 상관없어. 강해준 때문에 우는 만큼 나에게 미안해하고, 나에게 흔들려.


다 울었을까. 잠잠해진 백기를 보고 마이를 슬쩍 들췄다. 눈물로 엉망인 얼굴이 보여 석율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그 사람 앞에서 보이지 못하는 눈물을 내 앞에서 보여주니까. 이미 너는 나를 경계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석율이 제 마이를 백기의 어깨에 걸쳐주며 백기를 불렀다.


“백기씨.”
“…….”
“……고개 좀 들어 봐요. 닦아줄게.”
“제가, 하겠습니다.”
“씁. 오빠 화낸다.”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을 하지만 석율의 눈이 위험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백기는 잠자코 고개를 들었다. 안경을 벗겨낸 석율이, 손수건을 꺼내 백기의 얼굴을 꼼꼼하게 닦아냈다. 우느라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 하며 깨물어서 피가 배어난 입술, 처연하게 젖은 속눈썹까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백기를 한참 들여다보다 석율은 아오, 씨… 하고 기어코 욕을 뱉으며 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장백기.”
“네.”
“나, 고맙지?”
“푸… 네.”
“그럼 키스해도 돼?”
“…네?”
“아니, 키스할게.”
“잠깐, 만… 여기 회사, 읍…”


주저 없이 백기의 턱을 쥐고 끌어당긴 석율이 입술을 삼킨다. 버둥버둥, 제 가슴팍이며 어깨를 쳐 대는 백기의 손목을 홱 잡아채 뒤로 꺾고는 혀로 진득하게 입천장과 이 안쪽을 문지르자 백기의 몸에서 금세 힘이 빠졌다.



**



오랜만에 혼자 자취방에서 잠든 날이었다. 펄펄 끓는 열에 잠이 깼다. 깨어있는지, 잠든 건지도 분간하기 힘들 만큼 불덩이 같은 몸을 이끌고 겨우 일어나, 구석에 처박아뒀던 구급상자를 열었다. 해열제가, 있을 텐데. 안경을 끼지 않아 흐린 눈을 가늘게 뜨고, 백기가 더듬거리는 손으로 약을 쥐었다. 그리 넓지도 않은 자취방이라 냉장고까지 몇 걸음 되지도 않는데, 그 거리가 까마득하다. 물에 흠뻑 젖은 솜처럼 무거운 발을 이끌고, 냉장고를 열어 꺼내 든 물병의 무게감마저 평소와 달랐다. …왜 하필이면 오늘이야. 오늘만 버티면 주말인데. 왈칵 올라온 짜증에 무심코 고개를 젖힌 백기는 온 세계가 도는 느낌과 함께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금요일 아침, 눈에 들어온 시계는 아침 여섯 시 이십사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아침밥을 밀어 넣다, 얼마 못 가 도로 다 게워냈을 땐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셔츠 안에 히트텍, 셔츠 위에 니트 베스트에,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제일 두꺼운 코트까지 걸치고 캐시미어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 집을 나섰는데도 욕이 나올 정도로 추웠고. 해열제를 먹어서 어느 정도 열은 내려갔다지만 여전히 눈앞은 흐릿한데다 다른 사람들과 스치기만 해도 온몸이 징 하고 울렸다. 평소처럼 출근하려고 버스를 타고 나서야 택시라는 수단이 떠오른 탓에 그야말로 지옥 같은 출근길이었다. 학교 다닐 때였으면 아무 고민 없이 자체휴강하고 집에서 죽은 듯이 잠만 잤을 텐데.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 어떻게든 사무실에 도착한 백기가 느릿느릿 늘어지는 손길로 목도리를 풀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잘게 몸을 떨었다.


출근도 칼 같이. 특별한 일이 있을 때가 아니고서는 항상 아홉시 되기 15분 전에서 10분 전에 출근하는 해준이라 옆자리는 아직 비어 있다.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강, 해, 준, 하고 해준의 이름을 불렀다.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흐트러짐 없이 항상 완벽하고 섹시하기까지 한 사람이 이름도 해준이라니…. 신은 공평하다고들 하는데, 해준을 만든 걸 보면 가끔 안 그럴 때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넋을 놓다시피 한 백기를 현실로 돌아오게 한 건 다인이었다. 백기씨 일찍 오셨네요? 맑은 목소리에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아 네. 대답하는 백기의 볼이 붉어, 다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화할 수 있는 스트레스의 한계치를 넘은 몸은, 고작 약 몇 알로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앉아서 전화를 받고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두드리는 게 지금의 백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시야가 일그러지며 도는 탓에, 오늘은 해준의 옆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도 완벽한 사수는, 부사수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듯 혼자 바쁘게 일하고 있다. 평소였다면 또 자괴감에 빠졌겠지만 백기는 지금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집에, 가고 싶다. 아직 점심시간 되려면 20분이나 남았는데… 어떻게 견디지… 이미 몇 번이나 깨물어서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다시 깨물며, 백기가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만 더 견디면 점심시간이니까, 그 때 눈 좀 붙이면 될 거야.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타이밍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오전 내내 제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던 해준이 입을 뗐다.


“장백기 씨.”
“……네.”
“재무회계실 다녀오세요. 가면, 서류 주실 겁니다. 그거 받아오면 됩니다.”
“알겠, 습니다.”


해준이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오는 ‘모니터 보면서 말하기’ 스킬 덕분에 자신의 몸 상태를 들키진 않은 것 같다. 백기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만… 이 일만 끝내 놓고. 조금만 더 버텨줘. 정신 차리자, 장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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